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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여행] 영월 대야리 가재골 - “6·25 전쟁도 여기는 피해갔지요

오지하이에나 2012. 7. 20. 08:45

 
칼 같은 산과 비단결 같은 물 얽히고설킨 심산유곡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설키고 비단결 같은 냇물이 맑고 잔잔하게 흐른다. 얽히고설킨 칼 같은 산 중간 중간의 공간엔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남한강으로 유려히 흘러들어간다.


자리 잡은 형세가 영락없는 오지다. 육지 속에 틀어박힌 분지의 형국이다. 오죽 했으면 지명도 영월이라 지었을까. 영월(寧越)은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세조가 단종의 유배지로 영월을 택한 것도 아마 험한 지형이 고려됐을 것이다.


▲ 가재골에 사는 정영주씨가 그의 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가재골은 빛 바랜 나뭇잎들과 앙상한 가지에 몇 개 남지 않은 감나무로 본격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영월엔 해발 500m 이상 되는 크고 작은 산들이 30여 개나 된다. 대부분 1,000m 내외다. 가장 낮은 잣봉이 537m이고, 가장 높은 두위봉이 1,465.9m이다. 뾰족한 봉우리들이 영월을 첩첩산중 들쭉날쭉 에워싸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영월의 형세에 대해 소개하면서 고려 후기 문신 정추(鄭樞)의 시로 대신했다.


‘산에 걸린 달이 소나무와 전나무를 비추고, 맑고 잔잔한 냇물은 풀과 나무에 연기로 잠겼다. 주인이 학창의(鶴衣)를 헤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풍류가 그림으로 그려서 전할 만하다.’


학창의는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 하여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진 웃옷을 말한다. 정추의 시는 간단히 말해서 심산유곡에 신선이 나오는 듯한 풍광을 지닌 곳이란 의미다.


산 속에 갇힌 영월의 여러 지역 중에 김삿갓면 대야리 가재골(可在洞)이 있다. 가재가 많아서 가재골이 아니고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다’는 의미로 가재골이라고 붙였다고 전한다. 가재골은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평안도에 살던 박씨들이 십승지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한 데서 유래했다. 일설에는 본동과 떨어진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재골’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십승지를 답사하는 심정으로 한국의 대표적 오지인 영월, 거기서도 가장 오지라고 하는 가재골로 향했다. 영월 토박이인 현윤기씨와 ‘한국 700명산’ 저자인 신명호씨가 길 안내를 맡으며 동행했다.


88번도로를 타고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남한강과 옥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원래 맛밭나루터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민들이 남한강을 건너던 나루터였다.


▲ 정영주씨가 향토로 지은 그의 집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했다. 정씨는 가재골에 들어온 지 10년쯤 된다.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이 가재골 입구
옥동천을 가로지르는 잠수교 비슷한 다리 위에 가재골이란 커다란 이정표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리 위에 ‘홍수 시 출입금지 구역’이란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남한강 상류 방향으로 조그만 콘크리트 도로가 외길로 나 있다. 한쪽(북쪽)은 남한강이 흐르는 천길 낭떠러지이고, 다른 한쪽(남쪽)은 깎아지른 산사면이다. 한눈에 봐도 길을 닦은 지 몇 년 되지 않는다. 도저히 길이 날 수 없을 것 같은 산사면을 깎아 외길로 만들었다. 차량이 겨우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1km가량 올라가자 천혜의 계곡이 나온다. 남한강과 합류하는 계곡 끝 지점이 마을입구인 셈이다. 입구에 들어서서 마을을 바라보는 순간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밖에서 봤을 때 도저히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깊은 계곡은 산에서 흘러나와 남한강으로 합류한다. 모르는 사람은 길 찾기도 쉽지 않을 성싶다.


평안도 박씨들이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입구를 제외하곤 배와 수레의 접근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수구처 등이 험한 계곡과 협곡을 이루어 이방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는 형세다. 외부와의 연결통로는 모두 마을 입구 한 곳으로 연결된다. 원래 외부와의 연결통로가 어디인지, 콘크리트 도로가 나기 전에는 어떻게 다녔는지 궁금했다. 계곡을 들여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깊다.


▲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재골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길은 계곡 따라 난 외길뿐이다.

6·25 때도 전쟁 난 줄 모를 정도로 산에 둘러싸여
계곡을 따라서 1km 남짓 올랐다. 이곳에도 외지인이 찾아오는지 식당을 겸하고 있는 펜션이 나온다. 주인 정규태(丁奎台·58)씨는 태어나서 이곳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으니 한 200년이 넘었을 거요. 아버지는 여기서 살면서 일제 노무자 징집을 피했다고 들었어요. 이곳이 바로 피란처였던 거지. 6·25전쟁 때에도 피란 안 가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죠. 별 피해도 없었어요. 사실 전쟁이 난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해요.”


그럴 만했다. 삼면이 급사면으로 둘러싸이고 입구는 천길 계곡이 흘러 남한강과 합수되는데, 누가 이런 곳을 찾을 수 있겠나 싶다. 산자락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분지의 주거공간엔 물이 풍부한 지형이다. 논농사는 아니지만 밭농사는 어디를 개간해도 괜찮을 정도로 비옥한 땅으로 보인다. 집 주변엔 토종닭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꼬꼬댁~ 꼬꼬~” 소리를 내고 있다. 정씨의 얘기는 계속 됐다.


“이 앞 콘크리트 도로가 난 지는 불과 20년이 채 안 돼요. 그 전엔 영월읍내와 단양의 영춘장에 가기 위해선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했죠. 집 앞 마대산 자락을 넘어 영춘장으로 가는 데 왕복 40리, 영월읍내 장에 가는 데 왕복 80리니 새벽 3시에 일어나 내다 팔 콩과 약초 등을 지고 나갔어요. 돌아올 때는 먹을 쌀을 한 가마니 지고 왔죠. 올 때 갈 때 한 짐 지다 보면 기진맥진합니다. 왕복 수십 리 길을 돌아오면 밤 12시가 훌쩍 넘죠. 그러니 초롱불은 필수품이었어요. 한 짐 지고 초롱불을 켜는 상황이었으니 항상 큰아들과 둘이 같이 다녔죠. 둘이서 교대로 짐을 지고 초롱볼을 밝히면서 오고 갔죠. 이젠 그 자식들도 다 커서 도시로 나가고 우리 부부만 이곳에 남아 살고 있으니, 다 옛날 얘기죠, 뭐.”


▲ 가재골 어디든지 솟아날 정도로 물은 풍부한 곳이다.

세월의 무상함은 오지에서 더욱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어느덧 호롱불은 랜턴과 가정용 전기로 대체되고, 장날 짐을 지고 다니던 두메산골 소로인 토끼길은 등산로로 바뀌면서 동시에 마을 앞 콘크리트 길이 닦이고, 하루 종일 걸리던 80리 길은 차로 한나절 만에 해결됐다. 아이들이 하루 왕복 20리길을 걸어 다니던 맛밭나루터 맞은편 초등학교는 없어지고 애들도 전부 도시로 나갔다.


오지의 생활로 대변되던 여유와 기다림은 시·공간의 초월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문명의 이기인 휴대폰 하나로 처리됐다. 문명의 이기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오지에까지 들어와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정말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하는 세상이다. 인걸은 간데없고 산천만 의구한 이 오지에 문명이 자리 잡은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만감이 교차한다.


드문드문 있는 집은 전봇대가 일정 간격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전봇대로 연결된 이웃은 짧게는 몇백 미터에서 길게는 1km 남짓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전봇대를 따라 계속 올라갔다. 마치 협곡 같아 보였던 마을 입구의 계곡은 어느덧 도랑같이 작아져 사람과 같이 사는 모습으로 변해 있다.


‘영월의 정동 상류는 강원도의 유일한 피란처였다. 영월읍의 동편은 한강 상류가 남북으로 흐른다. 그런데 한강 동부의 만경대산 줄기가 동서로 뻗어 한강 의 지류로서 북쪽의 함백천과 남쪽의 옥동천의 분수령이 된다. 남사고는 옥동천을 피란처로 한 듯하다. 특히 (남)한강과 옥동천이 합치는 부근은 <임원십육지>에서도 대야평이라 했으며, 경작지가 넓게 발달해 있고 수목이 울창하여 주민들이 양봉을 한다’고 영월의 지명 유래에 나온다.


바로 남한강과 옥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가재골 마을 입구가 있다. 남한강 건너, 마을 입구 맞은편의 마을은 평야가 있어 논농사를 짓지만 가재골은 평지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면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추, 콩, 팥 등 각종 밭작물을 키우고 있다. 지금은 수확을 끝낸 뒤라 단지 그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한여름 나무에 매달려 있던 감도 이젠 실에 꿰여 담벼락에 걸려 있다. 깊어가는 겨울의 모습들이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늦가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고, 나아가 겨울을 재촉하는 듯했다. 오지의 바람은 매우 매서웠다. 오지의 겨울은 벌써 시작된 듯했다.


▲ 전체 13가구 정도 살고 있는 가재골에서는 띄엄띄엄 집이 있다.

찾아가는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제천에서 나와 38번국도를 이용하여 영월·태백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이어 영월읍에서 88번도로로 바꿔탄 뒤 남한강과 옥동천이 합수되는 부근에 있는 ‘나그네쉼터’에서 가재골로 방향을 틀어 외길로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숙박 가재골 마을 안에 유일하게 식당과 민박을 겸하고 있는 집이 ‘구구세 민박’이다. 민박은 주로 단체 손님을 받는다. 주민들이 옛날 다니던 소로를 등산로로 만들어 민박객들이 등산을 할 수 있게 조성했다. 민박객들은 인근 마대산이나 태화산까지 등산할 수 있다.


음식은 주로 토종닭을 이용한 메뉴가 주류를 이루며, 토끼탕과 시골순두부를 맛 볼 수 있다.


문의 033-372-9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