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계속되는 8월 중순.
상주시 남문통로 들어가는 중앙시장 한 곳에 자리한 대호상회를 찾았다.
중앙시장 통로를 조금 걷다 보면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호상회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고딕체로 ‘대호상회’라는 상호가 지난 긴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먼지가 앉아 흐릿하다.
활짝 열린 문을 들어서니 주인 장혜자(48)씨가 밝은 얼굴로 아주 반갑게 맞아 준다.
장씨는 이곳에 대호상회를 처음 연 오재봉씨의 며느리다.
상회 입구에 겹겹이 쌓인 다양한 솥들이 눈길을 끈다.
대형 가마솥은 역시 품위가 있다.
웅장한 기운을 뿜어낸다.
대호상회는 장씨의 시아버지인 오재봉씨가 1970년에 개업했다.
48년 역사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가업을 전수했다.
2대째 가마솥을 팔고 있는 것.
시아버지 오씨는 1970년 친구와 함께 상주에서 가마솥을 직접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다.
이렇게 만든 가마솥은 인근 구미와 안동, 예천, 문경 등 전국에 도매로 팔려나갔다.
상주 시장에서는 소매를 했다.
당시에 운송수단이 별로 없어 무거운 솥을 운반하기에 애를 먹었다.
오씨는 자전거로 무거운 가마솥을 몇 개씩 싣고 비지땀을 흘리며 직접 배달하기도 했다.
가족 모두가 가마솥 공장 2층에서 생활했다.
오씨는 새벽 4시께 아무도 가게 문을 열지 않은 시간에 가장 먼저 대호상회의 문을 열었다.
부지런하기에는 중앙시장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오랜 시간 그를 지켜본 주변 중앙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다.
1970년대엔 가마솥 전성기였다.
시골집 부엌마다 한두 개씩, 많으면 서너 개 씩 걸려 있던 가마솥.
가격도 만만치 않아 한 번 사면 바꾸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 닳지도 않아 한번 사가면 십수 년 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두세 번 찾아오는 단골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씨의 대호상회에는 연일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도매를 하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에 많은 지인들이 상회를 찾았다고 한다.
워낙 성격이 호탕하고 사람을 좋아해 장사를 하는 도중에도 손님들과 장터에 앉아 국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전국을 다니는 도매상들과의 술자리는 그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 때 직원이 4~5명이 있을 정도로 꽤 큰 규모의 공장이어서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였다.
생산해내는 솥의 용도도 다양했다.
큰 가마 밥솥과 화독, 용소솥, 소 여물용 대형 가마솥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었다.
그토록 잘 나가던 가마솥 공장은 1970년대 후반들어 양은솥이 보급되면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어떻게든 꾸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바뀐 물길을 되돌릴 순 없었다.
우직한 가마솥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다.
결국, 솥 공장 문을 닫았다.
하지만, 대호상회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여전히 상회를 찾는 단골손님들을 못 본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가마솥을 만드는 일대신, 충북 음성에 있는 삼성주물에서 무쇠로 만든 가마솥을 주문해서 판매했다.
며느리인 장씨가 대호상회를 맡게 된 것도 우연히 이루어졌다.
오씨의 3남인 오철우(52)씨와 지인의 소개로 대구에서 만나 결혼한 후 천안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남편인 철우씨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리게 되면서 고심 끝에 고향인 상주로 이사를 했다.
당시 시아버지 오씨가 운영하고 있던 대호상회 일을 돕게 되면서 조금씩 일을 익혔다.
하지만, 양은솥뿐만 아니라 80년대 중반에 전기밥솥이 나오면서 대호상회도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주방문화가 바뀌고 편리함을 찾는 주부들이 늘면서 가마솥 매출이 날이 갈수록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신혼 때 운영한 경험이 있는 치킨가게를 대호상회 바로 옆에 차려 겸업을 시작했다.
고육지책이었다.
2003년 70대 중반의 나이에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동안 시아버지 얼굴을 보고 찾아왔던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상회를 접어야 하나 고민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릴 적 남편의 모습을 기억하는 단골손님들이 드문드문 찾아와 위로와 함께 용기를 준 덕분에 마음을 추슬렀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가업을 이어가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남편 철우씨가 기술을 배워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형편이 좀 나아졌다.
철우씨는 퇴근 후에 아내의 일을 도와 무거운 가마솥을 배달하거나 옮기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상회의 모습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됐다.
가마솥 한 가지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웠다.
가마솥뿐만 아니라, 인근 예천에서 만든 여러 종류의 옹기를 접목했다.
같은 생활용품이라 솥을 장만하면서 옹기도 장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옹기부터 장을 담그거나 김칫독으로 쓸만한 큰 장단지까지 갖춰 제법 옛스러움이 묻어난다.
웰빙(?) 유행 탓일까.
최근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옛 가마솥과 옹기를 찾는 손님들이 제법 늘고 있다.
주로 사찰이나 웰빙식당을 경영하는 도심 대형식당, 귀농ㆍ귀촌 황토방 등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또 직접 장을 담그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을이면 메주콩을 삶기 위한 큰 가마솥을 사러 오는 손님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장씨는 “요즘 전기밥솥 제조사들이 가마솥 밥맛을 내겠다며 안솥을 무쇠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밥을 지을 때마다 기름칠하고 열을 가해 밥을 짓는(무쇠에 질을 내는) 그 특유의 밥맛을 따라올래야 따라올 수 없지요”라고 말한다.
특히 가마솥은 추억이 서려 있는 밥솥이다.
집집마다 밥을 지은 후 바닥을 박박 긁어먹는 구수한 누룽지는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가격면에서도 경쟁력이 점차 회복되고 있다.
장씨는 “가마솥 가격이 최근 가파르게 오르고 있지만, 대호상회는 오랜 단골들을 위해 인터넷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은 솥은 5만 원, 지름 30㎝ 솥 10만 원, 92㎝ 규모의 대형 가마솥은 23만 원 정도에 판매하고 있다.
최근 사용하기조차 힘든 각종 기능을 넣은 고가의 전기밥솥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착한 가격이다.
장씨는 “가마솥이라는 이색장사라 힘들고 큰돈도 되지 않는 사업이지만, 현재 고등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중 한 명이라도 시어른께서 시작한 가업을 이어받았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속내를 밝힌다.
“하지만, 내 욕심일 뿐이고, 이제 누가 이렇게 힘든 구식장사를 하려고 하겠느냐?”라며 “가업을 물려주고 싶어도 사실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되기도 한다”고 웃음을 띄웠다.
김일기 기자
kimi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