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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4. 동양안경원 - 전국 최초 안경전문점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8:47

전국 최초 안경전문점…협회대상 수상 등 명성 날려”         

동양안경원 초대 류만수 사장과 2대 배종명 사장(작은 사진). 류 사장은 20년간 동거동락해 온 배 사장을 가족처럼 생각해 동양안경원을 물려줬다.<br>
동양안경원 초대 류만수 사장과 2대 배종명 사장(작은 사진). 류 사장은 20년간 동거동락해 온 배 사장을 가족처럼 생각해 동양안경원을 물려줬다. 




영주시 동양안경원 모습. 최근 안경점이 대형화 추세로 변하면서 동양안경원도 중심가로 이전하며 깔끔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br>
영주시 동양안경원 모습. 최근 안경점이 대형화 추세로 변하면서 동양안경원도 중심가로 이전하며 깔끔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안경은 우리 몸의 일부분이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이지요.”
경북 최초의 전문 안경점이 영주에 있다. 
영주시 구성로의 동양안경원이 그 주인공이다. 

동양안경원은 1965년 류만수(86)사장이 경북 최초로 영주에 안경전문점을 시작했다.

당시 일반 안경점은 안경과 시계, 만년필, 라이터 등을 함께 취급하는 일종의 액세서리 가게였다.

하지만, 동양안경원은 순수하게 안경만을 취급했다. 
실질적인 전국 최초의 안경점이라 할 수 있다. 

동양 안경점은 5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대한민국 안경점의 산증인이다. 

◆깔끔한 현대식 안경점 탈바꿈 
동양안경원은 영주의 중심가인 번영로 156-1번지가 터전이다.

동양안경원 초대 주인인 류만수(86)사장이 1965년 이곳에 안경가게를 냈었다.

2대 배종명(53) 사장이 안경점을 이어받으면서 올해 영주시 구성로 275번지로 이주했다.

배 사장은 “요즘은 안경점이 너무 많고, 모두 체인점으로 바뀌는 등 안경점의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동양안경원도 깔끔한 현대식 안경점으로 탈바꿈했다”고 밝힌다.

2대 배종명 사장은 신세대 사장이다. 

류만수 사장이 나이가 많아져 안경점 운영이 힘들어지자, 15년 동안 직원으로 함께 근무해 온 배 사장에게 안경점 운영권을 넘겼다. 

배 사장은 류만수 사장의 가족은 아니지만, 동양안경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배 사장은 동양안경원에 대한 자부심과 초대 사장인 류만수 사장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는 류사장에게 “왜? 자녀에게 안경점을 대물림하지 않았느냐?”라고 묻자, 2대 사장인 배 사장을 가리키며 “이 사람도 내 가족”이라고 대답한다.

15년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했으니, 가족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류 사장은 배 사장과 함께 15년 동안 일해오면서 서로 믿음으로 함께해왔다고 한다.

류 사장은 안경점을 물려준 이후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끔 동양안경점을 찾는다.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일까? 자신이 평생 몸바쳐온 안경점에 대한 애착일까?
물론 배 사장도 류 사장이 한동안 안경점에 나타나지 않으면, 전화로 안부를 확인한다.

◆안경과의 운명적인 만남 
1965년 동양안경원이 문을 열 당시 안경은 신문물의 상징물이자 권위를 나타내는 액세서리로 취급되었다. 

류 사장은 “신문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으레 양복을 입고, 안경을 끼고 다녔다.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면 지식층으로 보였고, 인품도 남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고 1960년대 풍조를 설명해준다. 
그래서 눈이 나쁘지 않은 사람도 안경을 끼고 멋을 부렸다는 것.
그 당시 영주는 경북지역에서도 철도교통의 요충지로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당연히 신문물의 전파가 빨랐고 유행에 민감했다. 

초대 류만수 사장은 1958년 경북대를 졸업, 경북도 공무원 생활을 한 재원이다.

정교사 자격증도 있다. 
당시는 대학졸업자는 고사하고, 중학교만 졸업해도 취직 걱정이 없던 때였다.

공무원인 류 사장이 안경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당시 경북도 간부공무원으로 퇴직한 형님이 안경테를 만드는 동양셀룰로이드와 인연을 맺고 류 사장을 끌어들였다. 

류 사장은 공무원을 그만두고 동양셀룰로이드에 입사해 2년 동안 대전직매부에 근무했다.

월급쟁이보다 사업가로서 성공을 원했던 류 사장은 1965년 동양셀룰이드를 그만두고 안경도매상 사업을 시작했다. 

동양안경원도 그때 문을 열었다. 
‘동양안경원’이름도 안경테를 생산하던 동양셀룰로이드에서 따온 이름이다.

경북 전역과 강원도, 충청도 등에서 안경을 취급하는 곳은 모두 류 사장의 도매상을 통해야 했다.
나름대로 사업은 잘됐다. 
하지만, 거래지역이 워낙 넓어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상거래가 성행했던 당시의 거래방식이 류 사장을 힘들게 했다.
결국, 10년 이상 해온 안경도매업을 접고, 동양안경원 운영에만 전념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경북지역에서도 안경점이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류 사장은 도내 최초의 안경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최신 검안기 등 전문기계를 갖추고 안경점을 찾는 고객들을 정성으로 맞이했다. 

학생들은 물론 지역의 유지들도 대부분 동양안경원을 거쳐 갔다.

전국 최초의 안경원을 운영하면서 안경보급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경사협회가 수여하는 안경대상과 보건복지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류만수 사장은 사업 외에도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라이온스 회장을 맡으면서 안경사업으로 번 수익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 두 사람의 만남 
현재의 배종명 사장도 30년간 안경업에 종사해온 안경의 산증인이다.

대구 출신인 배 사장은 어릴 적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고등학교 시절 안경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안경업이 평생직장이 됐다.
고교 졸업 후, 당시 대구에서도 유명한 정안당 안경점에서 직원으로 수년 간 근무했다.

수년 동안 경험을 쌓으니 직접 안경점을 경영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직원 생활을 마감하고 포항에서 안경점을 개점했다. 

타고난 친절함과 성실함으로 점차 단골손님이 늘면서 안경점이 번창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자리가 잡혀갈 즈음,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고향도 아니고, 아무 연고도 없는 타향에서 맞은 IMF는 사업을 부도로 내몰았다.

“제 인생의 전부를 바쳐 온 가게의 문을 닫으려니 너무 허탈하고 허무했지만, 세상 탓만 하며 무작정 세월을 보낼 수 없잖아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안경점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직을 신청했지만, 모두 어려운 처지라 받아주는 곳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영주 동양안경원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만났다(?). 무작정 아무 연고지도 없는 영주로 갔다.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면접을 통해 처음 류만수 사장을 만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인생을 함께하는 사이가 됐다. 

◆동양안경원의 역사는 계속된다 
초대 류만수 사장이 나이가 많아지고, 건강이 예전만 하지 못하게 되자, 성실하고 안경점에 애착을 보이던 배 사장에게 오랫동안 근무해온 보상으로 퇴직금 대신 안경점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배 사장은 “류 사장님이 워낙 오랜 기간 안경점을 해 오셔서 찾는 손님이 많지만, 이제는 제손님도 못지않다”고 귀띔한다. 

배 사장은 “안경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매출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고객들에게 기술만 인정받으면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점점 더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체인화 된 안경점들이 생겨나면서, 기존 상거래의 질서가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배종명 사장은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양안경점의 명예와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며 “만약 내 아이가 안경점을 물려받지 않으면, 저도 류 사장님처럼 안경점을 이어갈 수 있는 누군가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의지를 밝힌다.

김주은 기자 juwuer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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