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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15. 제일서점 - 지역학생 청운의 꿈 키운 공간…지식전달자 자부심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9:25

윤지균 상주 제일서점 회장“지역학생 청운의 꿈 키운 공간…지식전달자 자부심”                 

대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브나르도 운동 차원에서 서점 경영을 시작한 윤지균 회장은 “인류가 있는 한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서점이 자손대대로 대물림 되기를 기대한다.<br>
대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브나르도 운동 차원에서 서점 경영을 시작한 윤지균 회장은 “인류가 있는 한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서점이 자손대대로 대물림 되기를 기대한다.



1960년대 서점앞에 선 윤지균 회장.
1960년대 서점앞에 선 윤지균 회장.



서점앞 전경.
서점앞 전경.



윤지균 회장과 아들 윤명기 사장.
윤지균 회장과 아들 윤명기 사장.



서점내부
서점내부


“책을 판다는 것은 장사꾼이 아니라 선비가 돼야 해.”
상주시 서성동 상주 중심가에 있는 제일서점. 상주에서는 가장 큰 서점이다.
그곳에는 80세 된 윤지균 어르신이 52년째 지키고 있다.

흰머리에 깔끔한 인상이라 범상치 않은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윤 회장’이라 부른다. 

윤 회장은 1965년 상주 중심가인 지금의 제일은행 옆 독서실 자리에서 제일서적의 문을 열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오랜 세월동안 서점운영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오직 한 길 책방을 지켜오고 있다. 

“그때는 모두가 경제적으로 빈곤해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 보릿고개도 넘어야 했고,  
윤 회장은 서점을 시작할 당시를 기억하며 “일본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대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브나르도 운동(문맹퇴치운동)이 지식인들 사이에 공감을 얻었다. 
그 한 방법이 신문보급을 통한 지식 전파였다.
돈보다도 지식이 요구되던 사회였다”고 말한다.

상주에서 가장 큰 서점인 제일서점을 설립한 윤지균 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단순히 생계유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전달자로서의 자부심으로 서점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서점에서 책을 사서 공부하며 청운의 꿈을 키운 학생들이 판ㆍ검사와 의사가 됐다.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준 것이다.

윤 회장은 당시로선 드물게 대구로 유학을 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중앙통의 모 학원 강사가 강의도중에 “남자라면 모름지기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우연히 그 말이 가슴에 박혀 결국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청년의 패기로 ‘어려운 국가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당찬 각오도 했었다.

“당시 경제와 상과가 결합한 경제학과에는 80명의 학생 중 2명이 여학생이었어. 여성은 배움에서 먼 시절이었는데도 말이야”라며 여든의 나이에도 대학시절을 상세히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더 많은 사람, 특히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지식과 정보의 전달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풍문’을 떠도는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였다. 

지금은 번듯한 4층 빌딩 1, 2층에 수만 권의 책을 비치해 놓았지만, 개점 당시 제일서점은 책도 얼마 없고 가게도 옛 집이어서 초라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집안 어른의 정혼으로 결혼한 아내 여정숙씨다.

‘여씨 향약’ 집안 종갓집 딸이기도 한 아내는 종갓집 딸답게 집안을 잘 돌봐 윤 회장이 서점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했다.

“처음 서점을 열었을 땐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지.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문을 열어두기 일쑤였다”고 회상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말끔한 정장 차림새다.

윤씨는 평생 정장차림으로 고객인 학생들을 깍듯하게 대했다.

학생들은 “책 장사가 아니고 마치 교장선생님 모습 같다”며 ‘사장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여든이 된 그는 한여름철에도 거의 정장차림으로 고객을 맞는다.

“정장을 입으면 단정한 마음이 들어서 좋아.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마음이 늘 단정하고 선비 같은 정신을 가져야 해”라고 이유를 밝힌다.

1988년 무렵, 상주 전체 중학교에 국정교과서를 공급하게 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서점도 현재 위치인 서성동 중앙로로 이전했다.

윤 회장은 “그 당시에는 신학기가 되면 트럭에 책을 싣고 학교에 배달했다.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고 회상한다. 

학생들로부터 추가 주문이 들어오면 자전거로 책을 실어 날랐다.
장날을 맞아 짐차를 운행하게 되면 짐차에 자전거와 책을 싣고 가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하루에 자전거로 60㎞를 달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도로가 좁고 비포장인데도 단숨에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고생했던 이야기를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이젠 추억의 자랑거리로 풀어낸다. 

“교과서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들과 선생님 얼굴을 떠올리면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어. 라면박스 1.5배 되는 부피의 교과서를 싣고 건빵을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고 하나씩 먹으면서 달렸지!”라고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배달하는 동안 많은 사고도 겪었다.

윤 회장은 “지금은 중동면에 다리가 놓였지만, 당시 배로 강을 건널 때 짐 실은 자전거가 모래사장에 빠져서 짐을 먼저 땅에 내려놓고 자전거를 옮기기도 했고, 외남면 지산재를 넘다 자전거 타이어가 파손돼 두어 시간이나 걸어서 끌고 오기도 했다”고 고생담을 들려준다. 

“어느 한 핸가 제일 더운 중복 날, 매호리에서 사벌면을 거쳐 공검면으로 갔다가 외서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이어 시내로 나왔다가 다시 외남면을 거쳐 공성면 용운중학교까지 200리 길을 하루 만에 다녀왔는데…, 세월 지나니 웃음이 나온다”고 무용담을 펼친다. 

무용담을 듣는 동안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다리를 만져보았다.
여든 노인의 허벅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다.

그는 상주지역 학생들의 진학에도 큰 도움을 줬다.
대단한 열정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화다.

1980년대 말께 서울 대성학원 책이 인기였다.

서울대와 연세대 등 좋은 대학에 가려면 대성학원 책을 봐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책을 공급받기가 쉽지 않았다.

“공급량이 달려 전국의 일부 서점에서만 이 책을 취급했어. 대구ㆍ경북에서는 대구, 안동, 포항, 상주, 김천의 서점에만 공급했는데, 재량권은 대성학원 담당자에게 있었지. 새벽 기차를 타고 담당자 집을 물어물어 찾아가 사정을 봐 달라고 애원했어. 상주는 낙후지역이라 이 책 없으면 상주 애들이 좋은 대학에 못 간다고 매달렸어. 담당자가 상주 학생의 미래를 불쌍하게 봤는지 한 때 대구ㆍ경북 총공급량의 50%를 상주에 배정해 준 일도 있지.”
그때 제일서점의 책을 사서 공부하던 학생 중 검ㆍ판사와 의사가 됐다.
윤 회장이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일이다.
자신의 꿈을 그들이 이뤄준 대리만족이다.

“인기 있는 책을 많이 배정받으려면 기를 쓰고 담당자를 찾아 부탁했어. 뭐 좀 챙겨주었느냐고? 상주에는 곶감밖에 더 있겠어? 우리는 그런 것 몰라”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영하 20℃까지 내려간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고 노동 중모중에 교과서를 배달하다가 오토바이 기름통에 허벅지가 닿아 걸린 동상은 그에게 또 다른 추억이고 상처다. 

“읽을거리가 거의 없다시피한 당시 서점은 요즘 도서관 역할까지 했다.
꾀죄죄한 아이들이 서점 한구석에 앉아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나중에 책이 파손되거나 중고서적이 됐다.
여러 번 쫓아내기도 했는데 미안해하며 슬그머니 다시 들어오는 아이들을 다시 내칠 수는 없어서 그냥 책을 보도록 뒀다”며 “옛말에도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했지않은가?”라고 말한다. 

이제 제일서점의 경영은 아들인 윤명기(52) 사장과 아내 정이금(48)씨가 맡고 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윤명기 사장은 대학졸업 후 아버지의 끈질긴 권유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1992년부터 아버지로부터 제일서점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다.
마침 아내 정씨가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책 전문가라 서점 경영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정씨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 학생 손님이 두 명 있었는데, 심심하면 우리 서점에 들러 책을 봤는데 두 학생 모두 서울대에 진학했다”며 보람을 얘기했다.

윤 회장은 “사실은 평생 서점을 했어도 정작 나는 책 한 권을 끝까지 정독하며 제대로 읽지 못했어. 책을 파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나마 1남 1녀인 자식들이 서점을 들락거리면서 책을 자주 봤지. 그 덕분인지 아이들이 제대로 잘 커 줘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양 기업은 있어도 사양 산업은 없다고 하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책은 인류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거야. 제일서점이 손자 대까지 대물림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라며 노신사의 바람을 밝혔다.

김일기 기자 kimi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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