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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13. 라라사진관 - “연필로 필름 수정하던 그 시절…연일 지망생 찾아와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9:21

“연필로 필름 수정하던 그 시절…연일 지망생 찾아와”                 

라라사진관 안두호 사장이 평생동안 함께해온 카메라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br>
라라사진관 안두호 사장이 평생동안 함께해온 카메라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관의 역사를 증명하는 오래된 카메라들.
사진관의 역사를 증명하는 오래된 카메라들.


안 사장의 작품들로 가득찬 사진관 내부 모습.
안 사장의 작품들로 가득찬 사진관 내부 모습.




반세기가 넘는 60년 동안 한 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상주시 남성동 라라사진관.
중앙시장 입구 좁은 도로를 따라 시장 끝자락 모퉁이에 ‘라라 스튜디오’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라라사진관의 첫 주인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공희 사장이다.
라라사진관을 개업할 당시는 1950년 6ㆍ25전쟁으로 전란을 피하고자 많은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국민들은 비참한 생활로 하루하루 연명해가고 있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공희 사장은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미광사진관 이정우 선생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8세의 청소년기에 라라사진관을 시작했다. 

그 당시는 요즘처럼 포토샵정보통신장비와 기술이 전혀 없었던 시기였다.

뾰족하게 깎은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수정하던 시대였다.
그 과정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흰 아크릴 판에 필름을 올려놓은 후, 뒷면에 빛을 비추고 일일이 수정해야 하므로,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고 집중력과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보통 5년 이상 필름수정 기술을 배워야 사진사가 될 수 있었지만, 이공희 사장은 1~2년 만에 기술을 터득하는 남다른 천재성을 보여 주었다고 현재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안두호(62) 사장의 증언이다. 

안 사장은 “그 당시 사진작가는 최고 엘리트로 대접을 받던 시기라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으며, 수입도 높은 편이어서 연일 지망생들이 찾아오는 등 장래가 유망한 직업으로 평가돼 인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 때문인지 이공희 사장도 가난한 농촌지역에서 사진관을 꾸려 돈도 꽤 많이 벌어 2남1녀 자녀 모두 대학에 보내고 결혼도 시키고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이 때문에 이공희 사장은 늘 ‘사진작가는 하늘이 내게 내려준 직업’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내 이름이 공희 즉, 구멍 공(空) 비출 희(熹)로 사진 찍을 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항상 껄껄 웃었다는 것. 
사진관 이름을 라라사진관으로 지은 사연도 재미있다. 
손님들은 기분좋은 일이 있을 때, 주로 사진을 찍으러 온다는 것을 알고, 손님이 사진관에 기분 좋게 들어올 수 있게 간판을 경쾌한 음악리듬을 잘 표현하고 있는 ‘랄랄라’와 비슷한 발음인 ‘라라사진관’으로 지었다는 것.  
그래서인지 이공희 사장은 고도의 집중력과 손재주, 좋은 시력, 감각적인 예술감각이 요구하는 아주 까다로운 수작업을 하면서도 항상 웃는 모습으로 즐겁게 손님을 맞이해 상주에서 사진관을 제일 크게 성장시킨 장본인이라는 것. 
현재 라라스튜디오 주인 안두호 사장은 이공희 사장의 처조카다.
20세 때부터 고모부 이공희 사장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후, 라라사진관을 이어받았다.
그 세월이 벌써 30여 년 이나 됐다. 

안두호 사장은 인생의 길잡이가 된 고모부 이공희 사장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늘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볼펜에 끼운 몽당연필을 가지고 밤늦도록 필름을 수정하던 그 모습이 고스란히 가슴속에 맺혀 있다”고 말한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사진관은 깔끔하다. 

사진관 옆 벽면에 길게 걸려 있는 파노라마 사진에 눈길이 갔다.
1984년 대한직업사진작가협회 연수를 마친 후 160명이 한꺼번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길이가 무려 2m에 이르고 있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역시 전문사진사작가들의 솜씨라는 생각이 든다. 

안 사장은 30여 년 전 열정과 활력이 넘쳤던 그때의 사진을 보면,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다시 한번 젊음과 용기를 주는 것 같아 매일 한 번씩 쳐다본 후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안 사장이 고모부 이사장에 이어 라라사진관을 운영하게 된 것은 1970년 초 고모부 이공희 사장이 손재주가 남다르다면서 이곳에서 일을 배우라고 권유했다는 것. 그때 고모부 옆에서 사진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30여 년 전 고모부로부터 사진관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사진기술을 배우고 익히던 시절, 고모부 이공희 사장은 늘“배우는 사람은 항상 겸손하고 성실함이 가장 중요하다”며 그 어려운 필름수정작업을 가르치며 조카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진작가에게 필요한 투철한 직업정신이 몸에 배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것.
안 사장은 “그때 단단히 교육을 받아서 정신무장을 한 덕분인지, 30년 동안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해도 피곤하지도 않고 싫증도 나지 않아 늘 즐거운 마음으로 기분 좋게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안 사장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친절함과 겸손이 몸에 밴 느낌이 느껴진다.

안 사장은 “요즘은 핸드폰에 카메라가 달려있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됐지만, 예전에는 특별한 날에만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회갑연ㆍ결혼식 등 인생에 큰일이 있을 때,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고 싶어하는 ‘그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밝힌다. 

어떤 때는 젊은이들이 맞선을 본 후 서로 마음에 들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같이 사먹고 바로 사진관에 들러 약혼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초등학교 운동회 때는 사진기와 삼각대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가 가족사진, 상을 타는 사진, 운동하는 장면 등 갖가지 모습을 촬영하느라 속옷까지 땀범벅이 되기도 했다는 것.
안 사장은 “그래도 그때가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며 “행사장에서 사진을 촬영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면 무거운 사진기와 삼각대를 들고 사진관 문을 열 때 반갑게 맞아 주던 아내의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특히, 상주 전통장날인 2일과 7일이 되면 사진관은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사진기 셔터를 누르기 바쁘게 또 다른 손님을 안내해야 하는 등 밀려드는 손님들을 촬영하기에 아예 점심은 거르기가 다반사였다. 

“어느 날 갑장산 바로 밑 동네인 비룡리로 오토바이를 타고 출장 가서 회갑사진을 촬영한 후, 주인이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붙잡는 바람에 막걸리를 나누다 보니 다음날 아침까지 마셨다”는 이야기. 오토바이를 타고 중동면으로 출사가는 도중에 낙동강을 건너려고 배를 탔다가 배가 뒤집혀 오토바이와 함께 물에 빠진 적도 있었다는 것. 
“몇 년 전에는 8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어르신 한 분이 와 ‘라라사진관이 아직도 있구나’ 하면서, 낙동면이 고향인데 어릴 때 서울로 가서 살다가 나이가 많아서 고향에 내려오게 됐다”며 “서울에 살 때 집에 불이 났는데 다른 것은 버려두고 앨범 3권만 가지고 나왔는데, 그 이유는 앨범 속에 가족들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며 사진의 중요성을 들려 주었다는 것.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15년 전부터 사진업도 디지털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진관에 손님의 발길이 뚝 끊이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누구나 휴대전화기로 사진을 찍는 세상으로 변했고, 그래도 틈틈이 오는 손님은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을 정도”라며 “그래도 예식사진을 촬영하는 덕분에 다른 사진관보다는 운영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셈”이라고 밝힌다. 

안 사장은 라라사진관을 대물림하고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서 사진관련 학과를 전공해 인근의 예식장에서 사진기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 이와 함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에도 큰 관심을 갖고 대를 이어 갈 준비를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다. 

평생 외길을 걸어온 장인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가슴 아파하는 사연이 있다.

수십 년 동안 틈틈이 자료사진으로 촬영해 두었던 ‘상주의 옛모습’들이 1998년 8월 중순에 내린 집중호우로 시내가 모두 물바다로 변하고 11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지하고 있던 필름원본들이 모두 물에 떠내려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아픈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안 사장은 “이제 사진관을 아들에게 대물림해주고 남은 인생은 내가 평생 꿈꾸어왔던 일을 하고자 열심히 뛰고 싶다”고 속내를 밝힌다. 

그 목표는 19년 전 잃어버렸던 상주의 옛모습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지금부터라도 상주의 역사를 하나하나 찾아가 사진으로 간직하는 일이다. 
사진만이 아닌, 상주의 역사를 담은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가기 위함이다.

“지금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바로 내일 그 풍경들은 사라지기 때문에 누군가는 사명감으로 꼭 이 일을 해야 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상주의 삶의 모습들과 풍광을 지금부터라도 자료사진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며 “우리 시민들의 생생한 삶은 바로 우리 시대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하다”고 말한다. 

김일기 기자 kimi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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