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길은 시작되고

오지여행

[스크랩] <포토 에세이>사무곡(士武谷) 방문기

오지하이에나 2016. 5. 16. 20:00
볼륨엄마야 누나야 - 이성원음악을 들으려면원본보기를 클릭해주세요.


 

 


 


세번을 올라야

닿을 수 있다는 땅

강원도 삼척,

 

길(道)이 따로없는 산중에도

사람의 발길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편리와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오지(奧地),

하지만 삶은 이어진다.

 

그 옛날

화전민이 살던 굴피집이

원형 그대로 

이어져오는 

해발 850여 미터의 산자락마을

사무곡(士武谷),

 

여기

제 손으로 지은 

평생을 함께 한 굴피집과

자기 인생의 끝을 생각하는

한 남자가 있다.

 

전기도 물도 없고

길과 함께  인적마저 끊긴,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

사무곡(士武谷)에는 

 

백 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있는  굴피집과

정상흥 할아버지(86)가

산다.


 

 

 


 

정씨 할아버지와

굴피집이 있는 곳은 참 멀기도 멀었다.

 

안그래도 낯선 초행길에

아직  한여름 전 인데도 초록은 넘실거리고

날씨 마저 무더웠다.

 

듣기로는

할아버지의 집은 가까운 마을에서부터

걸어서

2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빠른 산행 걸음으로 

1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 맑은 풍경을 누리기 위해선

댓가를 치뤄야 한다.

 

길이라곤 없는 산골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 것도

오래전의 일일 뿐이다.

 

 

 

 

 

 

 

 

 

 


 

 

 

 

 

 

 

 

 


 

 

 

사무곡으로 오르는 중간중간 보이는

오랜된

돌담과 석축이

 

예전에  이 곳에

집 터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씨 할아버지 집에 오르다  만난

폐가 한 채,

 

여기 폐가에 얽킨

가슴아픈 사연  하나를

소개한다.

 

 

 

 

 

 

 

 

 

 

 

 


 

 

가끔은

언론매체가  한 사람의 일생을  또는 

그 주변 사람들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부터

개인의 인생이나 사생활은

없어지는 것이다. 

1982년生 영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과

약초 캐기만으로 살아가던

산골소녀였다. 

 

 

 

 

 

 


 


 

 

이야기의 발단은 1997년,

산골마을에서 아버지와 조용히 살고 있던 영자

그때 나이 15세였다.

 

당시 

오지마을에 대한 사연이나

이야기를 연재 하던

모 잡지사의 눈에

영자 부녀가 눈에 띄었고,

 

'97년에 영자의 이야기

모 잡지에 싣는다. 

그 후,

 KBS 2TV 인간극장은

 '그 산속에 영자가 산다(5부작)'

방영한다. 

 

 

 

 

 


 


 

 

아버지와

조용히 산골마을에서 살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고

 

문학소녀가 되고 싶었던

영자의 일상이

방송되면서

시청자들의 가슴은 그녀의 순수함에

감동 받았고,

 

이 후

영자의 주소를 알게된 시청자들은

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영자를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책을 보냈으며

급기야 

집안에 책을 둘 곳이 없어서

마당에,

 

마당도 모자라

마당 한켠에

새로 작은 건물을 지어,

책을 쌓아 둬야 할 정도로  많은 책과

관심을 받게됐다.

또한 각지에서

영자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후원해준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공부하는데

돈 걱정 없이 공부하게 도와 준다니

방송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그 이후에도

2000년 10월에는

산골소녀

영자의 CF가 전국의 방송을 탔다. 

 

 

 

 


 


 

 

이제 영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얼굴을 다  알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불과 2년만에

그저 그냥 산골에서 살던 시골 소녀가

유명 인사가 된 것이다. 

그 후 영자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상경하여

초등과정 검정고시 준비를 할 수 있게 됐다.


이 모든 과정은

TV프로그램 인간극장과 다른 매체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됐으며,

 

이렇게 훈훈하고 따스하게

한 산골소녀의

아름다운 인생스토리는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영자가 서울에 상경하여 검정고시 준비에 열심이던

2001년 2월. 
영자의 아버지가 산골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경찰은 초동수사에서

영자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죽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가

 타살에 대한 가능성을 수사했으며,

 

결국 2001년 3월 13일

50대 남자  양모씨를 구속한다. 


양모씨는 영자와 그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범행이 용이하다는 점을

파악한 후,

 

CF출연료와 후원금을 노리고  침입했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당시, 정작  영자의 아버지는 돈 한 푼 없었다고 한다.) 

 

그 때 영자의 나이

겨우 19살,

 

 


세상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영자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또 영자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자의 아버지가 살해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라는

시집이 발간되었다.

 

하지만

이 시집 역시

영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그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창작물이었다.

 

또 한

그 추모시에 대한 인세로

고작 100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영자의

후원자를 자처한 사람은

영자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출연료와 인세를 횡령하여

구속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건이 있은 이후,
영자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19년동안

조용하게 세상을 꿈꾸며, 아름답게 살던

사무곡에서 완전히 떠나,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됐고,


현재 영자는

 도혜(道慧)스님이란 

법명으로

 

속(俗)을 넘어  승(僧)의 세계로

들어갔다.

 

 

 

 

 

 

 

 

 

 

 


 


 

 

 

 

 

 

 

 

 

 

 

 

 

영자 부녀의

애달픈 사연을 뒤로하고,

 

다시

정씨 할아버지가 계신

굴피집을 향 해,

오르고 또 오른다.

 

계곡을 세 번 건너고

경사 40도에 이르는 깔딱고개를

몇 번이나 지났는지,

 

길이나 넓은가 하면  그 또한 아니다.

 

5척 단신의

정씨 할아버지 홀로 수십 년을 디뎌 만든 길은

나름 오지와

웬만한 산행를 다녔다고 자부하는

나 자신도

좁고 힘든 길 였다.

 

 

 

 

 

 

 

 

 

 


 

 

 

진짜  이 산골에

여든이 한참 넘으신 분이 산다는게 사실인가,

 

숨이 턱 밑 까지 차 오르다 못해,

이대로 꼴딱

너머 가겠구나 싶던 찰라,

 

높은 산중턱 위로

할아버지의 집이 보였다.

 

 

 

 

 

 

 

 

 

 

 

 

 

 

우리의 반가움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우리 일행를 맞이 해주는

정상흥 할아버지.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해발 850미터

사무곡마을 정상부  정씨 할아버지집에 도착,

나는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정씨 할아버지가 살고있는

이 집은

굴참나무의 껍질을 지붕에 이은

굴피집이다.

 

할아버지가

50여년 전에 손수 지은 집이기도 하다.

 

 

 

 

 

 

 

 

 


 

 

 

 

" 요새 이런 집 갖고 있는 사람 별로 없지 .."

" 삼척에도 나 같은 사람이나 살지 다른 사람은 못 살아요 "

 

흙과 나무로만 지은 집은

주인이 조금만 무심해도 금새 허름 해 지게 마련인데,

 

할아버지의 굴피집은

세월의 무게에도

여전히

단정하고 튼실해 보였다.

 

" 여기서 80년 넘게 생활했지

 4살 때 여기 와서 올해 여든여섯이니까 "

 

정씨 할아버지에게 굴피집은

평생을 일궈 온 결실이자

가장 편안 한

쉼터이기도 했다.

 

 

 

 

 

 

 

 

 

 

 

 

 

 

 

굴피지붕의 재료가 되는 굴피를 채피하러 갈 때는  낫과 지게만 있으면 된다.

 

한 번 껍질 베끼고  3년 지나면, 속껍질이 이래 나와서 괜찮아요.
베낄 때 상하지 않게만 베끼면, 다시 껍질이 생겨나고, 또 생겨 나니까.”

 

굴피를 벗길 때

너무 어린 굴참나무는  껍질이 얇아서 못 쓰고,  너무 큰 나무는

억새서  또 못 쓴다고 한다. 

 

굴참나무는 적당히 자란 나무라야  껍질도 부드럽고

잘 벗겨진다는 것이다. 

 

 

굴피를 채피할 때는 처서 이전인 8월 정도에 하는 것이 좋다.
 처서가 지나면 물이 안 올라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코르크 마개로 사용될 만큼

 방수성이 뛰어난 참나무는 좀 처럼 새는법이 없다고 한다.

 

 

 

 

 

 

 

 

 

 


 

 


 

정씨 할아버지 집을 찾으면서

할아버지께 무엇을 사다 드려야 하나

고민끝에

 

할아버지가 

엄청난  소주 애주가란 얘기를

동네 이장님이 살짝

귀띔을 한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소주 큰병으로 3병,

작은병으로 3병을 준비 해

할아버지집을 찾았다.

 

 

처음의

시큰둥한 표정과 달리

오랜만에 말동무가 반가운지

할아버지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 난  혼자서도 술 잘 마시는 사람이야 .."

 

자연스레

술잔을 꺼내든 할아버지 곁에서

할아버지를 핑게 삼아 슬쩍

술 잔을 앞으로 

내밀어 본다.

 

 

 

 

 

 

 

 

 

 

 


 

지난 30년 동안

홀로 외로운 술 잔을  얼마나 마니

기울였을까,

 

 

 


 

 

 

 

 

 

 

 

 

(사진 가운데 분은 할아버지 큰아드님, 곧 어버이날이라 삼척시내에서 아버지를 모시러 왔다고 한다.)

 

 

한 때

10여 가구, 30여 명이 집집마다

소를 키웠고

농사로 소출도 많이 올리던

터였지만,

 

70년 대 정부의 이주정책으로

한 집,두 집 떠나가 

결국 남은 집은

정 할아버지의 굴피집 한 채,

 

가족들마저 자녀 교육 문제로 

삼척시내로 떠나가 버린 게 1985년.

 

지난 30년간

사무곡을 지켜온 건

정씨 할아버지와 그의 오랜 친구

굴피집 뿐 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산중에서의 외로움보다,

 

도심에서의 무료함이

더 견디기 싫은 것 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상흥 할아버지는

1931년에 태어나,

네 살 때 사무곡에 들어왔다고 한다.

 

스물 여섯,

軍에 입대할 때 까진

읍내에 나가 본 적도 없었다.

 

차남으로 

위로 큰 형님,

아래로는  여동생들과 막내 남동생을 뒀던 터라

집안 일은 항상

그의 독차지 였다.

 

다섯 살 무렵부터 시작한

지게질에

열 살 즈음부터 허리는

꼬부라졌다.

 

 

 

 

 

 

 

 

 

 


 

 

 

형님과 막내동생이 글을 배울 때도

그는 계속

나무를 지고 농사를 지었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 한 그가

글을 배운 건

군(軍)에서 였다.

 

아비 혼자서 지기엔 너무 버거웠을까,

삼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엉망이었다.

 

삼천 평의 땅에 황기를 심었고,

 

새 해가 지나면 황기를 캐고 나서

지금의 땅에

굴피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산은 높았고 굴피는 귀했다.

굴참나무를 찾아 십리 길을 다녔다고 한다.

 

굴피로 지붕을 얹는데 삼 년.

 

기둥에 쓰일 소나무를  건넛산에서

지고 온 것도,

 

수백 그루

굴참나무를 벗겨 지붕을 이은 것도

모두

정씨 할아버지였다.

 

 

 

 

 

 

 

 

 

 

 

 

 

 

이렇게 지은 집은

사무곡에서 규모가 가장컸고,

실제로도

큰 집으로 매김했다.

 

힘겨운 농사를 끝내면

사무곡 사람들은 어김없이 굴피지붕 아래 모였고,

마을의 대소사도

굴피지붕 아래에서 논의 됐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매 오 년 마다 굴피 지붕을 새로 가는 사이

정씨 할아버지의

두 아들과 두 딸이 태어났고,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을 사람들은 편리함을 찾아

산 아래로 내려갔고,

 

할아버지의 아내와 자식들 마저

읍내로 떠나갔다.

 

모두가 떠났기 때문에

정씨 할아버지는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편리함을 누려본 적도 없지만,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또한

떠나가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불편한 줄 모른 채,

매년 봄이면  초피와 두릅을 따고 각종 모종을 심었다.

 

이어지는 여름에는

천 여평 밭에 김을 메고,

굴피 지붕을 새로 이을  굴참나무 껍질을 벗긴다.

 

굴피지붕을 새로 잇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단감이 익어가고,

농작물을 수확할 시기가 된다.

 

그 사이 틈틈이

초피열매를 팔고, 부추를 팔고,

한 근에  5만원도 넘게 받는다는

하수오를 캐다 팔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쓰러진 나무들을 져놓고 

그렇게  아들, 딸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될 돈을 모으고

손녀들에게 줄 용돈을

챙겨두었다.

 

 

 

 

 

 

 

 

 


 

 

 

 

이 깊은 산골에서 살아가는 것은

생활 그 자체가 노동.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물과 전기였다.

 

이십 분 거리에 유일하게

할아버지가 기댈 수 있는 샘이 있지만

가파른 경사 탓에

물 한 짐 지고 오는 것도 수월찮다.

 

자연스레

두 번 씻을 거  한 번 씻고,

두 모금 마실 것  안 마시며 살아왔다.

 

그래도

물은 아껴 마시고,

빗물을 받아 빨래하고  설거지하면 된대도

전기 만은  아낄 수 없는

불편함이다.

 

전기가 없는 탓에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 하는 건

밥 하기.

 

30년여 년 간 할아버지는

홀로 이곳에서

외로운 밥상을 차린 것이다.

 

그야말로 먹고 살려고

노동을 한 것이다.

 

 

 

 


 

 

 

 

 

 

 

 

 

 

 

 

 

장작 넣고 불 때어 

그 숯으로 화로에 밥을 안친다.

 

오래된 냄비 속 밥이 골고루 잘 익게 하기 위해선

30분이 넘게 사방을 돌아가며

부채질을 해줘야 한다.

 

이렇게

밥 한 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총 2시간,

이런 불편함을 정씨 할아버지는

매일 같이

30년 동안을 해오고 있었다.

 

해 지면

달랑 호롱불 하나 켜고

두메산골을 지킨지도 그 만큼의 세월.

 

허나 사실,

할아버지는  그런 불편함을 전혀 모른다.

 

 

 

 

 

 

 

 

 

 


 

 

 

그렇게 정씨 할아버지는 홀로 지냈다.

 

산새들과 다람쥐,

멧돼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첩첩산중.

 

한 여름 장맛비가 내릴 때도,

할아버지 만을 위한 눈이 소복이 쌓일 때도  언제나

굴피집과 함께 홀로 지냈다.

 

이쯤 되면 한번 여쭤 볼 수 밖에 없다.

 

 

" 왜 산중에 혼자 사세요, 무섭지는 않으세요? "

" 무서우면  사람이 무섭지, 짐승은 무섭지 않아. 멧돼지도 사람을 무서워해서  먼저 덤비는 법은 없어 .."

 

할아버지는 왜 혼자 사는지에 대한 물음엔 줄곧 답을 않는다.

 

 

이 곳으로 오르기 전,

아랫마을 대평리 이장님 말씀을 들어보니

동네 어르신들 또한 걱정이

많다고 한다.

 

" 거기 혼자 계시다 다치거나 돌아가시기 라도 하면 어쩌려고 혼자 계시냐,

얼른 내려 와라 " 하면

" 사람은 제 죽을 때 되면 아는 법이래요. 나도 죽을 때 되면 다 아니 걱정 안해도 돼요."

 

 

 

 

 

 

 

 

 

 

 

 

 

 

 

할아버지에게

굴피집을 알게 해준 건 아버지였다.

 

아직도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며

매일 안부를 나눈다고 한다.

 

생전에 나무지붕 아래 살던 아버지는

이제 거처를

흙 아래로 옮기셨다.

 

할아버지도 언젠가

아버지의 길을 따라 가겠지 ..

 

 

 

 

 

 

 

 

 


 

 

 

 

어쩌면 세상이 겁날 수도 있다.

 

어느새 

아랫마을 사람들도

할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하게 됐고,

 

산 아래 누구도 

어느곳에서도 

할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든 여섯 평생의

人生과

굴피집을 함께 두고  내려오기에 

 

아래 세상에서의

정상흥 할아버지는

이젠 

너무 작고  외롭다.

 

 

 

 

 

 

 

 

 

 

 

 

 

 

어쩌면

우리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씨 할아버지 또한

자식들을 위함 였을 것이다.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유배를 택한 것일 수 있고,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인  굴피집을

더 온전히

지켜주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

 

그렇게

정씨 할아버지는  지금도

굴피지붕 아래 흙을 바르고, 기둥을 다시 세우고,

해마다 조금씩

지붕을 덮고 있다.

 

할아버지가

굴피집을 지키는 것인지,

 

굴피집이

할아버지를 지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렇게 사무곡에는

정상흥 할아버지와 굴피집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16. 5. 5 ~ 8일까지  3박4일의  오지여행 길에서 .. -

 

 

 

 

* 이번 연휴  

오지여행에 함께 참여 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특히

큰형님들 수고하셨고,

담에 또 뵐께요.

 

 

 

 

 

 

- 출    처 : 임재영의 유랑화첩

 

 

 

 

 






 







출처 : 오지여행*奧地旅行
글쓴이 : 임재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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