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전에 가면 오래된 한약방이 있다.
경주시 원화로 244 대제당한약방. 경주역 앞에서 50년 넘게 약을 짓고 있는 경주역 지킴이다.
터줏대감 이식(85) 대표는 “30대 청춘에 시작한 일이 이제는 팔순을 훌쩍 넘었다”며 허허롭게 웃음 짓는다.
“시작할 당시엔 그냥 먹고산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이웃의 건강을 돌보는 천직이 돼 50년 세월, 한 길을 걸어오게 했다”고 밝힌다.
경주역 바로 옆, 경주시가지 중심지역이라 한때 손님들이 줄을 이었던 한약방은 이제는 고요한 절간 같다.
손님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다.
이 대표는 “5일에 한 명, 어떤 때는 열흘에 한 명이 방문할 때도 있어…”라고 한다.
이제 한약방에서 약을 짓는다기보다 오히려 한약방을 지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경주 대제당한약방은 한때 경주시민들의 건강 지킴이이자, 경주한약방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식 대표는 순수 경주 토박이다.
진평왕릉이 있는 경주보문단지 입구 보문동에서 태어났다.
20대 청년 시절, 한약방을 하면 돈벌이가 좋다는 주변의 권고와 자신의 판단으로 한방으로 유명한 선생님을 찾아 경남으로 괴나리봇짐을 쌌다.
마산 유명 한약방에서 10년이나 한약재를 썰고, 관리하는 등 잔심부름을 하면서 힘겹게 한방공부를 했다.
10년을 한방에 몸담은 끝에 드디어 한약종상시험에 도전했다.
10여 명이 응시해 1명만을 선발하기 때문에, 이 시험을 통과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이 대표는 필기시험, 실물시험, 문답시험을 치르고 당당히 합격했다.
1970년대 30대 초반의 일이다.
당시에는 한약종상 자격시험에만 합격하면, 한약방으로 처방전을 내고 약을 지을 수 있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입으로 증상을 듣고, 몸을 확인하면서 처방전을 내 약을 직접 지었다.
10년 동안 어깨너머로 했던 공부보다, 자격증을 따서 한약방을 차려 직접 환자들을 만나면서 1년 만에 익힌 공부가 훨씬 깊고 알찼다.
이식 대표는 손님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내가 처방해서 지어준 약을 먹고,‘건강을 회복했다’‘정말 고맙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식 대표는 더욱 한의학에 깊게 파고들면서 침술과 뜸 등의 한의학 전반에 대한 공부에 심취했다.
어린이들의 경기에서부터 감기, 위장병은 물론 담석, 관절염, 중풍 등 노인들의 질병에까지 웬만한 병은 그의 손을 거치면 거뜬하게 나았다.
천여 가지가 넘는 한약재 중에 그가 중요하게 모아둔 약재만 해도 백여 가지가 훨씬 넘는다.
그중에서도 이식 대표는 당귀, 천궁, 백작약, 숙지황 4물을 가장 아껴 쓴다.
피를 돌게 하는 보혈제로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중요한 약재란다.
그의 공부가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손님들도 늘어났다.
따라서 수입도 증가하면서 3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땅을 사서 건물도 두어 동 지어 남부럽지 않은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게 됐다.
한의사 제도가 뿌리내리기 전에는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중장년들의 기력을 보하고자 보약을 많이 지어 먹었다.
1990년대쯤 10만~20만 원에 상응하는 보약을 지어가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십여 명에 이르렀다니, 한약방의 수입을 짐작할 만하다.
한창 일이 많을 때는 힘이 들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건강을 도우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행복했단다.
이 대표는 “한약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표정만 보고서도 어디가 불편한지, 무슨 약재를 어떻게 제조해야 할지 금방 답이 떠올랐지”라고 회상한다.
이식 대표의 약 짓는 솜씨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 손님들이 늘 한약방을 꽉꽉 메웠다.
“1년 365일 24시간 문을 열어두었다.
돈 욕심보다 아픈 사람들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이식 대표가 한약방을 운영하며 철칙으로 삼았던 경영방침을 귀띔했다.
대제당한약방은 그래서 요즘도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다.
체질에 맞아서, 약이 잘 듣기 때문에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이 진짜 손님이란다.
이식 대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지도 또한 자연스레 넓어져 지역 유지가 됐다.
초대 시의원에 당선돼 정치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역 라이온스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운동도 부지런하게 하면서 건강을 지켰다.
“연식정구는 경주시 대표선수로 발탁될 정도로 잘하는 수준에 올라 경주시장, 경찰서장, 세무서장 등의 기관장 모임에서도 단연 인기 톱이었다”며 이식 대표는 주름진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는다.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은 그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한의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한약방은 서서히 무너졌다.
또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폭넓게 적용되면서 3천 원 내외로 부담이 적은 약국으로 손님들이 발길을 돌렸다.
한약방은 몸을 보하며 치료하는 먹기에 좋은 한약을 취급하지만, 감기약 한 첩에도 최하 5천 원씩 하니 손님들의 발걸음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는 것.
이식 대표의 나이가 이제 팔십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수시로 드나들던 대제당한약방의 단골손님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자연의 순리란다.
친구들도 거의 사라졌다.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와병 중이거나, 자유로운 나들이가 힘든 나이가 되어 친구 만나는 일도 힘겨워지면서 한약방은 이제 이식 대표 혼자 지키는 독무대가 되어 버렸다.
“오래전부터 이제는 접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루하루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며 “체질에 맞는다며 나를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의 건강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선뜻 한약방 문을 닫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다.
젊은 시절부터 매일 운동하며 좋은 약재를 먹으면서 몸을 돌보아 왔던 덕분인지, 이식 대표는 아직도 자세가 꼿꼿하다.
“3남매가 모두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어 걱정이 없다”는 그는 “성실하게 무엇을,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삶이 최고”라는 그의 삶에 대한 철학을 50년이 넘은 노포 대제당한약방에서 지금도 지키고 있다.
언제 누가 찾아올지 몰라 문을 닫지 못하고,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를 이고 텔레비전 친구와 말을 주고받는 이식 대표의 대제당한약방은 오늘도 여전히 ‘영업 중’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