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공용버스터미널.
지금도 “오라이∼ 스톱, 한 발짝만 안으로 좀 들어가 주세요. ‘빨리빨리 올라오세요”라고 외치던 차장(안내양)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는 의성군 금성면 탑리버스정류장 김재도(81) 대표.
그는 한평생을 버스터미널에서 늘 북적대는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왔다.
김 대표의 삶의 터전은 일생동안 오직 버스정류장 그곳이었다.
명실 공히 탑리지역의 터줏대감이다.
탑리버스정류장은 1954년 문을 열었다.
당시 버스 여객회사였던 대구여객과 단독계약으로 정류장으로 지정받아 승객들을 대상으로 승차권을 매표하면서 임시업무를 시작했다.
그 당시 대구여객 버스는 대구 동부정류장에서 하양-청통-영천 신녕-군위 의흥-우보를 거쳐 의성 금성 탑리까지의 노선으로 하루 한번 왕복 운행했다.
왕복 소요시간은 약 6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1960년도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했다.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칠곡-천평-군위 효령-관동-우보-의성 탑리로 왕복하는 노선이 새로 생겼다.
이때 탑리에 종점을 둔 버스가 처음으로 생겨났다.
막차를 운행해 온 운전사와 조수, 안내양 등 3명이 탑리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당연히 정류장 주인인 김 대표가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운전사와 조수는 남자이기 때문에 김 대표와 한방에서 자고, 안내양은 여동생 방에 함께 지내면서 한가족처럼 지내야 했다는 것.
“그때만 해도 옛날이야기지. 추운 겨울 새벽 첫차가 출발하려고 하면 밤새 엔진이 얼지 않도록 이불로 덮개를 덮어주고 했지. 그래도 옛날 차량이라 새벽에는 시동이 잘 안 걸려…. 뜨거운 물을 끓여서 엔진에 부어 녹인 후, 시동을 거는 쇠막대(일명 스타팅)로 힘차게 엔진을 몇 차례 돌리면 끼릭끼릭 거리다가 겨우 부르릉∼시동이 걸리면 운행하기도 했지. 그땐 운전사가 귀한 대접을 받을 때라 시동을 거는 일이나 고장이 나면 고치는 일은 모두 따라다니던 조수가 다했지”.
김 대표는 50∼60여 년 전의 젊은 날을 추억하며 당시의 상황을 마치 어제의 일인 양 신바람이 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은 많고, 버스는 겨우 하루에 한두 대가 대구로 갈 때라, 시외버스는 항상 승객들이 만원이라 빽빽하게 태우고 장거리 운행을 했지. 그런데 고물차라 사람이 너무 많이 타면 차 엔진에 열이 나서 시동이 꺼져. 그러면 승객들이 내려서 오르막길을 버스를 밀고 올라가기도 하고, 엔진을 식히기 위해 한참 동안 차를 세워두고 함께 쉬어가기도 했지. 차가 중간에서 고장이 나면, 운전사와 조수가 직접 차 밑으로 들어가서 뚝딱 고쳐서 운행하던 그런 시대였지.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때는 사람들이 여유가 있고, 낭만도 있었지”.
김 대표는 그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한다.
세상은 점점 변해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의성군 금성면 지역에 서서히 손님이 늘어나고, 읍면지역으로 가는 시외버스 노선도 한두 개씩 늘어나면서 서서히 정류장의 모양새가 잡혀갔다.
그 당시 읍면 마을로 운행하는 시외버스의 주요 고객은 주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통학과 시골에 사는 주민들이 면 소재지에서 5일마다 열리는 전통시장을 보려고 버스를 이용했다.
모처럼 5일장에 나온 주민들은 당시 고추, 마늘, 밀, 쌀 등을 팔아 고등어와 꽁치 등 반찬과 생필품을 마련하는 등 일주일간 생활할 수 있는 장을 보곤 했다.
이런 이유로 시골지역 승객들은 5일장으로 내다 파는 짐 보따리가 많아서 조수ㆍ차장들과 승객들이 매일 승강이를 벌이면서 짐을 싣고 다녔다는 것.
“그래도 그때는 버스운전사가 인기가 많아서 버스 운행을 하면서 인연을 맺어 운전기사들이 농촌으로 장가를 많이 들기도 했지.”
승객이 서서히 늘어나면서 여객회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버스가 늘어나 운행횟수가 많아지면서 탑리 정류소도 1972년 처음으로 공용버스정류장으로 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탑리버스정류장’의 모습을 갖췄다.
1976년에 이 자리에 슬라브 집에다 알루미늄 섀시 등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벌써 40년이 넘었다.
김재도 대표도 청소년기에는 탑리에서 의성읍에 있는 공립 의성중ㆍ고등학교까지 13km를 걸어서 다녔다고 회상했다.
당시 버스를 이용하는 주 승객은 학생들이었다.
읍ㆍ면 소재지에서 자취하거나, 친척집에 얹혀 생활하다가 점차 버스 운행횟수가 늘어나면서 시골집에서 매일 통학을 할 수 있었다는 것.
탑리버스정류소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버스도 늘고, 승객들도 불어나 경영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80년대, 90년대가 되면서는 정류소에 버스가 빽빽하게 들어찰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정류장 기능이 확대되면서 소장직도 생기고, 각 여객회사의 감독들도 근무하면서 정류장이 활성화됐다.
김 대표는 “그 때는 새벽부터 학생들의 장난과 싸움, 승객들의 큰 목소리와 말다툼 등으로 정류장에 하루종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형성돼 주민들의 가장 가까운 생활터전으로 자리매김했지”라고 말한다.
그 당시 탑리버스정류장을 이용한 승객들은 학생 500여 명에다 일반 승객들도 500여 명씩, 하루 1천여 명이 이용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정류장이 지역의 중심가 역할을 하게 되면서 당연히 정류장 주변이 발전하기 시작하게 됐다.
정류장을 중심으로 매점, 주유소, 약국, 식당, 다방, 술집 등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심지가 형성돼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주민들의 통행이 이어지는 등 지역분위기가 확 바뀌어져 갔다.
김 대표도 탑리에서 태어나 의성 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탑리버스정류장을 운영하면서 탑리지역의 유지가 됐다.
지역발전과 봉사에 앞장서 JC 및 JC특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금성농협 조합장, 탑리새마을금고 이사장, 군 단위 법원조정위원, 검찰 청소년선도위원, 군청 혁신자문위원 등도 거쳤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세상이 변했다.
농촌에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이농현상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또한, 삶의 질 향상으로 집집마다 자가용이 늘어났다.
자연히 버스 승객이 줄어들면서 탑리정류소는 급속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늘 북적거리며 소란스럽던 정류소는 점차 시골노인들 차지가 됐다.
버스를 탈 승객이 없으니, 시외버스가 줄어들고, 그 대신 정부 시책으로 새마을 버스(지금의 의성여객)가 생겨났다.
김 대표는 “주민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생겨난 새마을 버스는 편리하게 운영되다가 수익성이 떨어지자 공용버스정류장을 거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2000년대 후반기부터 정류소 운영이 적자국면으로 접어들어 지금까지 벌어둔 재산을 다 털어 넣고 있다”며 힘겨운 표정이다.
지금은 탑리 버스정류장에 하루 30여 명의 승객이 이용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도 승차권 판매원의 인건비는 줘야 하고, 제세공과금, 통신료, 전기료 등 고정비용이 나가 적자확대는 불가피한 실정이라고 설명한다.
김 대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건비라도 보조해 주든지, 공용버스정류장 자체를 자치단체가 운영하든지 등 운영방법에 대해 건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아직도 일평생을 함께해 온 탑리버스정류장을 떠날 생각은 없다.
“평생 고향에 살면서 좋을 때도 많았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지금 형편이 어렵다고 내가 당장 그만두면 꼭 버스를 타야 할 시골주민들의 불편이 눈앞에 선하게 보인다”며 “비록, 적자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힘 닫는 데까지 봉사정신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심경을 밝힌다.
김호운 기자 kimh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