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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7. 죽도 열쇠 - 전국에 제자 50명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8:55


전국에 제자 50명…시대 발맞춰 전자키 복제도 섭렵         

죽도열쇠 분점 내부전경. 2009년 본점 인근에 분점을 냈다.<br> 300여 종의 열쇠와 기구들이 빽빽하다.<br>
죽도열쇠 분점 내부전경. 2009년 본점 인근에 분점을 냈다. 
300여 종의 열쇠와 기구들이 빽빽하다. 


죽도열쇠 분점 김건식 대표.
죽도열쇠 분점 김건식 대표.


죽도열쇠 분점 외부 모습. 열쇠 복제 실력은 동해안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br>
죽도열쇠 분점 외부 모습. 열쇠 복제 실력은 동해안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포항시 북구 죽도동 ‘죽도열쇠’. 1949년 처음 문을 열었다.
68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니, 포항의 대표적인 ‘노포(老鋪ㆍ대대로 오랫동안 운영되는 점포)’임에 틀림없다. 
1평 남짓한 열쇠가게는 시내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인근 죽도시장을 끼고 있어 인지도는 높다. 

“(바쁜데)취재는 무슨….” 구순을 내다보는 여사장님이 인터뷰를 단번에 거절했다.
계속되는 부탁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손님이 줄을 서는 맛집은 불친절하다’고 했던가. 10여 분 간의 실랑이 끝에 겨우 옆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웃주민이 “아들한테 가 봐라”고 귀띔해 준다.
할머니 가게는 본점이고, 아들이 하는 분점이 더 크다고 한다.
아들가게가 형식상 분점이나 실질적 본점인 셈이다. 

본점은 단순한 열쇠 복사가, 분점에서는 수많은 경험과 기법을 바탕으로 열쇠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분점은 본점과 차로 1분 거리에 있었다. 
가까운 거리여서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고 무작정 찾아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문득 떠오르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사전에 인터뷰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을 자책했다.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던 중, 봉고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가 분점 대표 김건식(54)씨다. 
반가웠다. 
인사를 건네자 돌아온 그의 첫마디는 “(약속 없이 찾아왔는데도 나를 만나서)운이 좋네!”였다.
고객이 전화하면 출장 나가는 일이 다반사여서 가게를 비우는 일이 많다고 했다.
대신 가게를 찾은 손님이 헛걸음할까 전화기24시간 켜 놓는다고 부언했다.
“(인터뷰할 때도)호출 오면 바로 나가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는 김 대표. ‘친절한 건식 씨’다.

‘죽도열쇠’는 1982년 죽도시장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전까지는 김 대표의 아버지가 손수레 노점에서 열쇠를 만들어 판매했다.
그의 아버지 고향은 함경도다. 
북한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이전 귀순해 포항에 정착했다.
그리고 열쇠 만드는 일을 배워 장사를 시작했다. 

얼마 뒤 6ㆍ25전쟁이 발발해 남한군으로 참여했는데, 전투 도중 폭탄 파편을 맞게 됐다.
폐에 박힌 파편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여러 차례 병원에 다니며 파편을 제거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결국, 부인인 김 대표의 어머니가 열쇠업을 대신 이어받아 장사하며 남편 병원비와 자식들을 돌봤다. 

김 대표가 열쇠업을 이어받은 것은 부모님의 열쇠 제작 기술을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연구하고 배워서 기술들을 익혔다고 한다. 

현재 그의 열쇠 복제 실력은 동해안에서 최고수준이다. 
300여 종의 열쇠를 다 꿰고 있다. 
외국에서 들여온 특수재질의 키를 제외하곤, 그의 손을 거치면 모두 복제가 가능하다.
그의 밑에서 배워 독립한 제자만 전국에 50명이 넘는다. 
이런 기술로 인근 금고털이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경찰에서 그에게 자문을 구하기가 부지기수다.
“과거에 절도사건만 나면 형사들이 찾아왔다. 
은행 금고를 고쳐주면서 주변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힘든 시절을 회상한다.

인터뷰 도중, 손님이 왔다. 
장애우 전동 휠체어 주인이 열쇠를 잃어버려 복제하러 온 손님이다.
열쇠가 없기에 키 뭉치를 눈으로 보고 어림짐작으로 복제했지만, 이내 시동이 걸렸다.
그의 실력에 박수가 나왔다. 
전동휠체어 주인도 그의 실력이 최고라며 칭찬했다. 

열쇠 기술을 배우느라 피나는 노력을 한 후, 생활이 안정적인 시기에 접어들 때쯤 디지털 도어 시대가 찾아왔다. 
열쇠의 디지털화로 설 자리를 잃은 열쇠집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전자키에 대한 끊임없는 기술 연구에 매달리면서 새 기술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매출은 급성장했다. 

2009년에는 분점을 차렸다. 
본점은 여전히 노모가 맡고 있다. 
김 대표는 “분점을 차리고 나서는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새벽에 손님들의 호출이 와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단잠을 깨고 나가면서 고객과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끊임없이 연구 노력한다면, 결코 사양업은 없다”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세상 조언을 한다. 

대를 잇는 장수기업의 비결을 묻자 “소상공인들의 경쟁력은 결국 ‘신뢰’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열쇠공뿐 아니라, 많은 소상공인이 불친절함과 바가지로 신뢰를 잃고 있다”며 “어떤 서비스라도 믿을 수 있고 좋은 제품만을 쓴다면, 그 가게는 100년 이상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의 가게 안으로 초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강렬한 빛이 그의 성공적인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김웅희 기자 woo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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