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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11. 협동동물병원 - 오토바이 타고 농가마다 왕진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9:06

“소가 가족같던 시절…오토바이 타고 농가마다 왕진”         






협동동물병원 진료실의 모습. 이화식 원장과 평생 함께해 온 진료기기와 각종 서류가 오랜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처럼 진료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br>
협동동물병원 진료실의 모습. 이화식 원장과 평생 함께해 온 진료기기와 각종 서류가 오랜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처럼 진료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화식 원장이 협동동물병원 진료실에서 애완견 예방접종 등 치료를 위해 진료를 하고 있다.<br>
이화식 원장이 협동동물병원 진료실에서 애완견 예방접종 등 치료를 위해 진료를 하고 있다.


협동동물병원 전경.
협동동물병원 전경.


의성군 안계면 안계 길 127-1 나지막한 1층 슬라브건물.
‘협동동물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양편의 2층 건물에 치여 왜소해 보인다. 

외벽의 페인트는 벗겨지고, 간판도 꾀죄죄하다. 
영락없는 노포(老鋪)의 모습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이곳엔 숱한 사연이 숨어 있다. 


◆소박한 삶, 봉사차원의 진료 

들판이 넓어 ‘안계 평야’라고도 불리는 안계들의 벼가 누렇게 무르익어가는 지난 주말,
협동동물병원을 찾아 나섰다. 
동물병원은 안계 면 소재지 한복판에 있어 금방 눈에 띈다.
낡은 문짝마다 ‘동물병원’이라고 큼지막하게 몇 개나 써 붙였다.
휴대전화 번호와 병원 전화번호도 곁들였다. 
세월의 흔적이 스민 오래된 건물과 간판이 오히려 정겨움이 느껴진다.

협동동물병원에는 이화식 원장(84)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박물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온갖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있다.

이 원장이 58년 동안 애용해 온 가죽소파는 곳곳이 갈라져 골동품 수준이다.

책상 위에는 각종 서류와 주사기, 진료도구 등이 널려 있다.

5평 남짓한 진료실이 비좁을 정도로 물건들이 들어차 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의료도구는 소파에 앉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게 배치해두고 있다.
모든 기구들이 한결같이 빛바랜 구식이라 이화식 원장과 평생 함께해 온 살아있는 역사로 느껴진다. 


◆나의 인생 80세에 말하고 싶다. 


취재과정은 험난했다. 
이 원장은 연세가 높아 귀가 어두워져 대화를 나누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협동동물병원의 역사에 대해 필담을 나눴다. 

그래도 잘 통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 원장의 자술서(?)를 받아서 정리해야 했다.

이 원장이 직접 쓴 ‘인생자서전’의 제목은 ‘나의 인생 80세에 말하고 싶다’이다.

84세의 고령임에도 손떨림 없이 능숙한 필체다. 
이 원장의 인생이야기는 의성군 금성면 청로리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원장의 증조모께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중앙정부 관리들이 지방 정부 행정을 감찰ㆍ감독하고자 말을 타고 내려오는 공무원의 숙소를 관리해 주면서 모은 재산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고 이배근)는 3대 독자였던 터라, 부잣집 도련님으로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집안 어른들은 3대 독자가 밖에 나가면 행여나 잘못 될까 봐 학교도 보내지 않았을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귀한 아들, 안방 도련님으로 성장한 아버지는 고집과 아집으로만 가득 찬 ‘독불장군’으로 자라났다. 
성인이 되었으나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술과 노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결국, 그 많던 재산은 수년 만에 다 탕진했다. 
집안살림이 극도로 궁핍해졌다.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자란 탓에 자존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고생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딸과 4대 독자인 막내아들 등 3남매를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학교는 구경도 못해본 일자무식이셨지만, 영민하고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셨다.
당시 의성에서 가장 상권이 발달했던 안계면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시어머니가 해 오던 방식대로 안계에서 식당과 숙박업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수년 만에 경제기반을 이룩했다.

이 원장은 “‘여자는 연약해도, 어머니는 용감하다’라는 말이 우리 어머니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고 고백한다. 


◆서울대 수의과 졸업, 대구 동물병원 개업 
어머니는 오로지 ‘4대 독자인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이 원장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괘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 합격했다. 
시골에서 서울대에 입학한 이 원장은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10회)을 졸업하고, 대학강단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연세 드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공부보다는 생활이 급했다. 
1965년 10월에 대구에 내려와 동물병원을 개업했다. 
동물병원은 생각보다 꽤 잘 됐다. 
하지만, 어머니가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극심한 신경성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의성으로 내려가자”고 간절하게 원했다. 
결국, 잘 나가던 동물병원을 정리하고, 제2의 고향인 안계로 낙향했다.
그때 개업한 곳이 지금의 협동동물병원이다. 


◆라이온스 회장 등 지역 유지로 활동 

대구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 아내가 시골로 이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아내도 1년 만에 안계여자중학교로 전근와 가족이 합류했다.
도시생활에 적응치 못하고 신경성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어머니도 동네 할머니들과 어울리면서 병세가 사라지고 안정을 되찾았다. 

다행히 의성군 공수의 활동을 하면서 동물병원도 완전히 정착했다.
수의사는 농촌지역에서 더 할 일이 많았다. 
의성군 지정 수의사로 활동하면서 이름이 알려져 재정도 탄탄해졌다.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1986년 당시 안계 라이온스가 출범하게 됐다. 
선ㆍ후배 지인들이 적극적으로 회장에 추대했다. 

이 원장은 “안계는 어머니가 어려운 상황에서 재산을 일구게 된 바탕을 제공한 곳이었고, 나 역시 짧은 시간에 안정적인 자리를 잡은 제2의 고향으로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며 “당시 재정적인 뒷받침도 주변의 추천으로 회장의 직책을 맡게 됐다”고 말한다.

이 원장은 “그때가 내 인생의 최고 황금기였다”고 회상한다.
안계 라이온스클럽을 본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해온 것이 80년 인생에 가장 큰 보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원장은 요즘도 라이온스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동물병원의 변화추세 

농업이 주축이던 시절에는 농가마다 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소가 큰 재산이라 가족처럼 여겼다. 
당연히 동물병원은 호황기를 맞게 됐다. 

수의학이 발전하면서 동물들의 치료역할을 담당했다. 
농가마다 수의사들에게 왕진요청을 했다. 
이 원장은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의성 서부지역 7개 면 지역을 바쁘게 다니며 동물들을 돌봐야 했다. 
주로 질병에 걸린 소를 치료하거나, 송아지의 출산을 도와주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
그대가 수의사가 최고 대접을 받던 전성기였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영농형태가 기계화로 전환되면서 일하는 소의 역할이 없어졌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운기와 트랙터가 소를 대신했다. 

게다가 동물제약회사들의 약품생산 발전과 축산농가들의 자가치료가 가능해지면서 수의사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이 원장의 ‘협동동물병원’도 시대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했다.
도시지역 동물병원은 애완동물 치료로 시대 흐름에 적응해 갔지만, 농촌지역은 애완동물도 거의 없어 점점 설 땅을 잃어갔다. 
지금은 이 원장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협동동물병원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부인도 수년 전에 세상과 이별하고 혼자가 됐다. 
의사인 자녀도 서울에서 생활하며 제 생활에 바빠 명절 때나 가끔 얼굴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원장은 “내 나이 80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동물병원을 지키고 있고,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 원장은 아직 합동동물병원의 간판을 내릴 생각은 없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낡은 진료실을 지킬 예정이다. 

대구일보 김호운 기자 kimh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