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가 오랜 기간 도민들에게 각종 서비스를 해온 장수 사업체의 가치를 조명하는 작업에 한창이다.
2013년 전국 최초로 대를 이어 30년 이상 전통 산업(제조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업체를 ‘향토 뿌리기업’으로 선정, 지원해온 경북도가 그 영역을 서비스업으로 확대한 것이다.
일명 ‘경북의 노포(老鋪) 찾기’에 나선 도는 26일 현재 12개 시ㆍ군 18곳의 노포를 발굴, 스토리텔링북 제작을 통한 조명 작업에 들어갔다.
한 시대,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경북의 장수 서비스 업체를 만나보자.
“아이쿠 뭐 볼 거 있다고 이렇게….”
팔순을 바라보는 대구미용실의 최말순(79) 대표는 고왔다.
30도를 웃도는 더위에도 ‘여자 나이를 속일 수 없다’는 목 주름을 가리려는 듯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얼굴은 화사했고 손톱의 초록색 매니큐어가 눈에 띄었다.
순간 초록빛으로 물든 모내기 들판이 스쳐 지나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한여름날. 예천군 풍양면 낙상 1길 69번지. 풍양면 사무소 인근에 있는 ‘대구미용실’을 찾았다.
이곳은 스토리텔링 제작을 위한 경북도의 장수서비스 선정 업체 중 미용업 분야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건물은 요즘 좀처럼 보기 드문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이다.
평면 간판 테두리와 바탕은 낡았다.
‘파마, 고데, 드라이, 신부화장’ 글씨는 색이 바랬지만, ‘대구미용실’ 글씨는 크고 선명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미용실 규모는 안방 등을 포함해 10평 남짓. 손때가 묻은 각종 미용기구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최 대표는 1964년 이곳에서 예천군으로부터 ‘미용업’ 영업신고증을 받아 개업했다.
풍양은 결혼하면서 정착한 곳이다.
그리고 53년 동안 풍양면 일대 여성들의 뷰티 헤어를 책임졌다.
“단골손님이 많을 때는 80명 씩이나 됐다.
그때는 색시들이 많았지. 미용실 바깥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였어. 고데는 200원, 파마는 500원에서 800원이었지.”
구미가 고향인 최 대표가 미용 일을 처음 시작한 곳은 의성군 안계였다.
친정은 가사 도우미를 두 명이나 두고 살 정도로 잘 살았다.
중학교 졸업 후 대구 수창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Y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딴 최 대표는 오빠가 살던 의성 안계에서 미용 일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19살이었다.
“당시 내가 미용 자격증이 있다 보니 풍양면 한 미용실에서 나를 스카우트했는데 서너 달 만에 그만뒀어. 손님이 왔다고 해서 나가보니 웬 남자가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여자 한복 입고 와 있는 거야…머리를 하러 온 게 아니었지. 여기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안계에 있는 오빠 집으로 돌아갔어.”
해군병원에 근무하던 남편도 그때 만났다.
그러나 시집은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방 한 칸에 7∼8명이 살았다.
친정 가족의 강한 반대 속에 5년 열애 끝에 결혼한 최 대표는 ‘대구미용실’ 간판을 걸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대구에서 공부했다는 자부심에 미용실 이름에 ‘대구’라는 글자를 넣었어. 손님도 많아 살만했지. 머리 하다가 산기(産氣)가 와서 남편을 불러서 아기를 낳기도 하고….”
미용 솜씨가 좋다 보니 단골손님들은 딸과 며느리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왔다.
풍양장날이면 미용실을 찾은 손님들과 함께 밥을 먹기도 하고 남편은 이들의 짐을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고객관리가 탁월했던 것이다.
최 대표는 자신의 두 아들만 키우지 않았다.
미용실에 버려진 아이 4∼5명을 키워 둘은 시집을 보내기도 했다.
혼자된 시동생 아이들 셋도 맡아 키우기도 했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남을 위하며 아들 둘을 바라보며 행복을 일궈온 최 대표는 그러나 교통사고로 장성한 두 아들을 잃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후유증은 3년이나 지속됐다.
남편도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세상을 떴다.
세월이 약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어여쁜 큰 며느리와 건강한 손자 둘이 있어 행복하다.
10여 년 전 고관절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최 대표는 손에서 가위, 고데기를 놓을 생각이 없다.
힘 닿는 데까지 일할 수 있는 곳을 가진 것 또한 행복이다.
“젊은 사람들도 머리 만지는 손기술은 아직 나를 따라오지 못할 거야.”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신감이 가득했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