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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10. 해동라사 - 40년째 재단기술 연마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9:02

“40년째 재단기술 연마…맞춤양복 제2전성기 기다리죠”

        
        


해동라사 이경락 대표의 재단하는 모습. 24세 청년 때 양복점을 인수 받은 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한길을 걷고 있다.<br>
해동라사 이경락 대표의 재단하는 모습. 24세 청년 때 양복점을 인수 받은 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한길을 걷고 있다.


맞춤 양복을 위해 손님 허리둘레를 재는 이경락 대표.
맞춤 양복을 위해 손님 허리둘레를 재는 이경락 대표.


경주시 외동읍 입실시장길 7-6번지에 자리 잡은 양복점 해동라사.
경주시 외동읍 입실시장길 7-6번지에 자리 잡은 양복점 해동라사.


수선할 때 사용하는 이경락 대표의 손때묻은 재봉틀.
수선할 때 사용하는 이경락 대표의 손때묻은 재봉틀.


경주시 외동읍 입실시장길에 있는 반듯한 사각형의 점포. 멋을 부려 새긴 ‘해동라사’란 간판파스텔 톤으로 변하긴 했어도 오히려 오랜 역사를 품은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밖에서 살펴보니 유리진열장 안에 멋진 양복 윗도리가 반듯하게 진열돼 있어 ‘바로 이것이 내 솜씨’란 증명을 하듯이 당당하게 느껴진다. 

체크 남방이 썩 잘 어울리는 해동라사 이경락(64) 대표. 그는 1976년 1월20일 이곳에서 자리 잡은 후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직 한 길, 해동라사를 운영하고 있다.

“커피 한 잔 하실랍니까?”  
적당하게 벗어진 머리,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닌 이 대표가 건네는 믹스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진실하고 속정이 깊은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양복점 안을 휘돌아 보니 예전의 양복점 모습 그대로다. 
요즘엔 기성복이 일반적인 추세지만, 이곳은 옛날방식으로 줄자가슴둘레와 허리둘레를 직접 잰 후 재단을 해서 양복을 만든다. 

손님들이 양복감을 선택할 수 있도록 벽을 따라 양복감을 가지런하게 배열해 두고 있다.

손때 묻은 오래된 재봉틀, 양복감을 재단하는 재단 대 등이 마치 이 대표의 분신처럼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다. 
이곳이 이 대표가 평생 살아온 공간이다. 

이 대표에게 “양복을 만드는 곳인데, 간판을 양복점이라고 하지 않고 왜 해동라사 라고 했느냐?”고 물어보니 “60∼70년 당시엔 규모가 큰 양복점은 ‘00라사’라고 했고, 규모가 좀 작은 곳은 ‘00양복점’이라고 간판을 달았다”고 설명해준다. 
그 당시에는 경주에서 상당히 유명한 양복점이었다는 것을 은근슬쩍 내비치는 느낌이다.

이 대표는 지금은 ‘양복기술의 장인’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니 구구절절한 사연이 많다. 

경주 외동읍이 고향인 그는 1966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4살 설을 지내고 곧장 고향을 떠나 대구 서구 내당동의 방직공장으로 향했다. 

당시엔 누구나 비슷한 환경이었지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어디든지 취직을 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린 나이에 일이 험하기로 유명한 방직공장에서 생활한 2년의 혹독한 세월은 평생 잊지 못한다는 이 대표. 그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눈물이 난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겨울이면 연못 얼음을 깨 빨래를 하면서 손이 얼어서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어려운 환경이었지. 하루 건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우거나, 생쌀 밑에 죽, 죽 밑에 탄 밥 일명 3층 밥으로 끼니를 겨우 해결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이었다고 회상한다. 

누구나 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하루 100원, 한 달을 꽉 채워야 3천 원을 벌던 그 2년 동안의 방직공장 생활에서 그는 2만 원을 벌어 고향 외동읍 입실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처절했던 2년간의 방직공장생활을 밑거름 삼아 기술을 배워야 산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기주 선생에게서 6개월간 재단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의 해동라사를 처음 운영한 고 이성관 선생 밑에서 재단과 양복 일을 배웠다.
방직공장에서 지낸 힘든 세월이 그를 성실한 청년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1976년 24세 때 양복점을 인수받았다. 

양복점을 인수받아 운영하던 해에 결혼했다. 
그리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양복 한 벌에 6만 원에 재단되던 1970년 후반에는 단골손님들이 꽤 많았다.

이 대표는 잘 나가던(?) 양복쟁이였다. 

“그 당시에는 모두 양복을 맞춰 입을 때라 양복점을 차린 후 3년간은 동네손님뿐 아니라 단골손님들의 주문이 넘쳐서 인기가 좋았다”고 말한다.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그는 “ ‘이 옷 입고 미국에 간다’라고 말한 고객도 있어 내가 만든 작품이 멀리 미국까지 가는구나 하는 뿌듯함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하면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준 사람도 있다”며 “양복 외상값 10만 원을 갚지 않은 고향 사람인데, 외상값 받으러 갔다가 도리어 볼때기를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이 대표는 손님이었던 그를 손놈(?)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지워지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는 표시다. 
“그 손놈(?)이 지금도 고향에서 뻔뻔스레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힌다니까”하며 허허로운 웃음을 웃는다. 

지금는 옛날 기술자로 취급받고 있지만, 유행이 돌고 돌듯이 이 대표는 언젠가는 양복기술이 다시 전성기를 맞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때를 대비해 1994년 대구 제일모직에서 운영한 봉제기술 강습회에 참여하는 등 꾸준히 자신의 재단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이 대표는 “40년 갈고 닦은 내 기술을 이어받을 자녀는 없지만, 후계자가 나타난다면 고스란히 기술을 전수해줘 장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는 당당한 자신감이 숨어 있다. 

요즘도 이 대표가 만든 양복은 한 벌에 VIP 가격이 75만 원, 대중 58~60만 원 선에 판매하고 있다. 
물론, 기성복을 외면하고 손수 만든 양복을 선호하는 신사 등 단골손님들 이야기다.

이 대표는 요즘 일 년에 7~8벌 정도의 양복을 만든다. 
그 외에는 주로 바지 길이와 바지통을 수선해 달라고 주문하는 외국인 등이 해동라사 손님의 대부분이다. 
양복 장인이 겨우 하루 3~4만 원 매출이 전부일 뿐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교복도 만들어 주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학기가 되면 학생들의 교복 주문이 들어와 가까스로 매출을 맞추어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지역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지역 자율방범대 봉사를 시작했다. 

20여 년 동안 꾸준히 봉사한 끝에 지난 2002년부터 자율 방범대 운영위원회원이 됐다.
이 대표의 모습에서 보릿고개 시대의 역경을 넘어, 이제 세계적인 경제 대국의 반열에 선 ‘의지의 한국인’의 대표인물을 만난듯한 풍미가 느껴진다. 

이 대표는 요즘 3D 기피현상에다 편한 일만 찾는 젊은 세대에게 따끔하게 충고한다.

“어쨌든지 열심히 살아라.”, “일해야 먹고산다. 
”라고. 
그 말 속에는 ‘힘들게 살아본 사람만이 안다. 
그 삶 속의 깊이와 넓이를 직접 체험해봤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외침으로 들린다.

김산희 기자 sanh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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