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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老鋪) 9. 현대 이발관 - 손기술·빛바랜 이발기구…박물관 그 자체

오지하이에나 2018. 1. 11. 09:00

“입소문 났던 손기술·빛바랜 이발기구…박물관 그 자체”

        
        


박용덕씨가 이발을 천직으로 살아온 삶의 공간인 현대이발관 전경.
박용덕씨가 이발을 천직으로 살아온 삶의 공간인 현대이발관 전경.


60여 년간 이발을 천직으로 한 길만 걸어온 박용덕씨. 건강이 허락하면 100살까지 이발소를 지킬 생각이다.<br>
60여 년간 이발을 천직으로 한 길만 걸어온 박용덕씨. 건강이 허락하면 100살까지 이발소를 지킬 생각이다.


박용덕씨가 주민들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다.<br>
박용덕씨가 주민들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빛바랜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블록집. 전형적인 시골집의 소박한 모습이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듯한 의자 두 개가 툇마루를 대신한 듯 정겹게 붙어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 옆에 세워둔 자전거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힘겹게 기둥에 매달려 있는 삼색 등과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 나무문에 한 글자씩 세로로 붙여 만든 현대이발관이란 글자가 여기가 이발관임을 알리고 있다.

문경시 동로면 여우목로 2786. 현대이발관.  
박용덕(77)씨가 지난 1957년부터 무려 60년간 이발을 천직으로 살아온 그의 삶의 터다.

다섯 평도 채 안 된 이발관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다. 

오래된 이발의자 3대와 하늘색 타일로 마감한 세면대, 눈에 익숙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기의 빛바랜 사진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녹을 뒤집어쓴 채 속살까지 드러낸 금고, 하루에 두 번 맞을 듯한 멈춰진 시계 등 낡고 찌그러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한결같이 박씨의 손때가 묻은 정겨운 것들이다. 

그는 15살의 어린 시절부터 이발사의 길을 걸었다. 
11살 때 발발한 6ㆍ25전쟁이라는 폭풍은 시골마을도 예외 없이 휩쓸고 갔다.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생계를 위해서는 기술이 최고’라고 판단했다. 

“단돈 10원이라도 내 손으로 벌고 싶었어요. 어렸었는데 어떻게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는 무작정 마을 이발관을 찾아가 청소와 손님 머리 감기기, 면도하기 등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조금씩 기술을 익혔다. 
군대에서도 이발병으로 근무하며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기술을 익혀 정식으로 이발사가 됐다. 
이발관 허가증을 받아들고 이발소를 개업했다. 
어릴 적 막연하게 꾸었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타고난 부지런한 심성에다 최고가 되고자 피땀 흘린 그의 노력 때문인지 점차 동네에서 실력 좋은 이발사로 유명세를 탔다. 
점심때가 되어도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동로면에는 이발소가 6군데나 영업을 했어. 그런데 유독 우리 현대이발관에만 손님들이 북적북적했지”. 손님들이 많아 영업이 잘되면서 197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발관을 이전했다. 

“새벽 5시부터 영업을 시작해서 온종일 일해도 손님들의 머리를 다 손질할 수 없었어요. 요즘은 인기있는 맛집 등에서 대기표를 주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도 현대이발소 번호 대기표가 100번이 넘은 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약간의 허세가 섞인 것 같지만, 그때를 회상하는 박씨의 얼굴은 행복한 표정이다. 
머리를 잘 깎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족단위로 손님들이 줄을 섰다.
“그렇게 한 달 꼬박 벌어서 32만 원주고 집도한 채 마련했을 정도였다니까? 아이 다섯도 이발로 다 키웠다 아닙니까?”라며 자랑한다. 

하지만, 그도 세월의 변화는 비켜 가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자 이발소에 손님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미용실 등 전문헤어샵 등에 밀려 이발소는 점차 사양산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씨는 여전히 이발을 천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전처럼 호황의 시절은 꿈처럼 사라졌지만,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3일과 8일, 문경 5일장이 들어서는 날에는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
그래도 한 달에 15명의 손님맞이도 쉽지 않을 정도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의 현대이발관 건물도 내년이면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다.
문경시의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老) 이발사는 숙명처럼 받아들여 평생을 함께해 온 ‘이발’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내가 문을 닫으면, 찾아오시는 단골손님들은 이발할 곳이 없어 불편할 것 아니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살까지는 이발소를 지킬 생각이지요. 허허허.”

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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