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광복절 징검다리 연휴를 이용해
몇 몇 회원들과 38선과 가까운 이곳 저곳을 돌아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목요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태풍의 영향으로 어제까지 멀쩡하던 날씨는 아침부터 비를 뿌리고
화창하면 더 좋겠지만
비 내리는 날 투어도 나름 좋다는 생각으로 1차 아이볼 장소를 향해 달려 간다
의정부를 지날때 쯤
파주쪽 하늘을 보니 간간히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포천에서 1차 아이볼을 하고
다목리를 향해 가는데 내 바램과는 달리 야속하게도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그칠줄 모른다
이번 여정의 첫 방문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관련 시설물인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다목리에 있는
인민군 사령부 막사다
1945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단순한 형태의 1층 건물로 6·25전쟁 당시
화천과 철원 일대를 관할하던 인민군사령부 막사로 사용되었단다
1960~1970년대에는 국군의 피복 수선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이후 방치되어왔고
31.3m X 1.2m 크기의 직사각형 평면에 화강석과 시멘트로 마감하여
아직도 튼튼한 벽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인민군 시설의 면모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희귀성이 인정되는 군사시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천 인민군사령부 막사 [華川人民軍司令部幕舍] (두산백과)
인민군 사령부 막사 바로 앞쪽에는 인근 군부대의 부식창고인듯한 건물이 있는데
지방도에서 보면 근대문화유산인 인민군사령부 막사가는 길 안내판이
잘 안보이는 편이다
막사 안쪽의 모습
키가 작아 창문 안쪽을 들여다 보지 못한 사람들끼리
기념사진 한방 찍고~~~
출입문이 참 특이하게 생겼다
문만 보면 유럽의 어느 나라 창고를 연상케 하는 모양이다
인민군 사령부 막사를 나와
지도에서 봐왔던 화천 학생야영장 뒷편 계곡을 찾아가 본다
학생야영장 정문을 지나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개인들이 와서 야영하기에는 곤란할듯 하다
나오면서 캠퍼들에게 물어보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화천군청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을 하고 야영장은 사용이 가능하단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점심 시간은 다가오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했던가
비를 피하기 위해 파포리 마을회관 마당에 있는
정자에서 라면으로 해결한다
역시나 동네 주민이 술이 건아하게 취하셔서 일단 시비부터 걸고 본다
역시나 삥 뜯으러~~~온건 아닌듯한데
누구허락 맞고 사용하느냐는둥
너무 술이 취해서 예초기를 등에지고 혼자 걷다가 그대로 풀밭에 ~~~ 꽈당~~
119신고해줄랬더만 ~~~
다음 코스는
화천 선이골과 칠성전망대를 가기 위해이동 중
선이골에 들른 후에 칠성전망대를 갈 예정이었으나
비가 계속 오는걸로 봐서는 칠성전망대를 먼저 갔다가 나오면서
선이골로 가야할것 같아서 산양리를 향해 간다
산양리로 가는 길
칠성전망대 안내소 앞 화분에는 이름 모름 노란 꽃이
빗방울에 젖어있다
현제시간 오후 1시 10분
전망대 출발시간은 오후 2시
남는 시간을 이용해
산양리 다방 김마담이 타주는 커피한잔을 하기 위해
모두들 다방을 찾아 시내로 나간다
다방은 안보이고 산양리에 있는 DMZ 영화관~
아마도 군인들을 위한 시설인가 보다
다방을 찾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 무리들
짜장면집 간판이 재미나다
산양리에 있는 상점들은 대부분 군인들을 고객으로 하기에
군인 관련 상품점이 많다
다방은 결국 찾지 못하고
편의점 원두 커피로 시간을 때우고
2시에 각자 차량을 타고 칠성 전망대로 이동한다
두번째 검문소
길가에 이름 모를 병사의 동상이 서 있다.
뭔가 공을 세웠기에 동상을 건립한듯 한데
이곳은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라 ~~
차에서 내릴수가 없어~~~사진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300m정도는 도보로 이동 한다
영화 고지전의 배경이된 425고지가 이곳 칠성전망대에서 보이고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돌아 나오는 길 여전히 검문은 ~~
전망대를 나와 선이골로 향한다
선이골 외딴집 일곱식구이야기라는 책표지에 실린글이다
,<강원도 선이골 외딴집 한 채. 전깃불도 우체부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농사짓고, 나물 캐고, 책 읽고, 동식물과 살아온 지 7년. 살듯이 공부하고 공부하듯이 살아가는 부부와 그들의 다섯 아이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철 따라 엮어내는 사람내 뭉쿨 나는 이야기!>
작년에 가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못가고 이번기회에 들려 본다
지방도 입구의 표지석
비교적 입구쪽 길은 포장이 되어 비가오는 길이지만
문제 없이 갈수 있다
비포장 길이 시작되고 길은 점점 좁아지고
길가에 잡초와 잔ㄱ가지들이 무성해서
대륙의 명예 옆구리 까지는 소리가 맘을 아프게 한다
길은 점점 험해지고 빗줄기는 거세진다
한번도 안가본 길이라 걱정이 되기도 하고
<2006년 1월 12일 한겨레 신문에 기사>
[한겨레] “이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참으로 빌고 빌 뿐이야. 그 사람을, 용희를 제발 돌려줬으면 좋겠네.”
환갑을 넘긴 한 사내의 시선은 빈소 앞에 놓인 영정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른 어깨는 결국 무너지듯 들썩거렸다.
애써 참았던 눈물은 눈가의 주름을 타더니 이내 굵은 마디가 되어 흰수염을 덮었다. 자신과 함께 이룬 다섯 아이들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김명식(61)씨는 그렇게 흐느껴 드러냈다.
고 김용희(45)는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던 인생의 반려자이자 동지였다.
그의 흐느낌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7년 전 도시 떠나 화천 외딴집에 온가족 둥지
‘가난의 풍요’ 글로 다큐멘터리로 전해 큰감동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그대로의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중년의 부부와
다섯 아이의 삶을 다뤄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2003년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선이골 다섯아이를 품다>의 주인공 김용희(45·여)씨가
지난 9일 오후 영원한 안식처인 자연속으로 돌아갔다.
그의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죽음이었다.
버거웠던 도시의 삶을 벗어나 온 가족과 함께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골인
‘선이골’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지 7년.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 외딴집에서 숲이 전해주는 꾸밈없고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려 애쓰던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필요에 넘치는
모든 것을버리고 단 몇 권의 책과 공책, 연필 한 자루, 두 벌 옷과 한 짝의 신발,
이불 한 채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서 조차 ‘가난의 풍요로움’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라 하겠지?
자연과 유리된 대도시에선 가난이 재앙이고 큰 불편이겠지만 이곳에선 가난은
자유이며 축복이지.”라며 적극적인 자연귀의적 삶을 갈구했다.
다섯 자녀들은 ‘하늘평화학교’라 부르는 그 외딴집에서 부모에게서 글을 배우며,
선이골 품 안에서 대자연의 섭리를 익혔다.
같은 제주도 출신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온몸을 던져 싸우다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던 역사연구가 남편과 더불어 그녀는 자연과 만나는 대안적 삶을
따르며 ‘똥이 오물이 아닌 거름’이 되기를 갈망했다.
선이골에서의 삶을 오랜 글쓰기로 남겨놓았던 그녀는 지난 2004년 여름
부부와 다섯 아이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책 <선이골 외딴집 일곱 식구 이야기>
(도서출판 샨티)를 펴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선이골에 와서 참 만남의 의미를,
빛과 어둠의 아름다움을, 외식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나를 다시 만나고 있다.”
80년대 우울했던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 직접 약국을 운영하면서도
사람들의 체질과 질병에 따라 양약 대신 민간요법을 권해왔던 그녀는 인위적인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선택한 선이골에서의 삶에서 깊은 만족감을 얻었다.
그는 그 감사함을 책을 통해서 이와 같은 말들로 표현했었다.
조금은 더 이어졌어야 할 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가 숨진 다음날인 지난 10일 밤.
8년만에 처음으로 선이골에 전깃불이 밝혀졌다.
산아래 이웃들이 여러곳에서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위해 농삿일에 쓰던 발전기를
들여와 불을 밝혀준 것이다.
햇빛이 머금어준 달과 별의 천연의 기운만으로도 그 밝음이 도시의 차가운 빛에
모자라지 않던 선이골의 밤은 홀연히 하늘로 떠난 안주인과의 작별을 위해
요란스런 문명의 기기에게 자리를 내줬다.
다섯 아이들 중 장남 선목이(17)는 의연한 표정으로 잠 한숨 자지 않으며 손님들의
뒷바라지에 나섰지만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마다 소리없이 눈물을 훔쳤다.
아직 엄마의 부재가 실감이 나지 않는 네 동생들은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
틈에서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는 듯했다.
골짜기 나무숲을 휘감는 솔바람도, 이름모를 돌틈사이 잡풀도, 얼음 밑 작은
개울물도 소리를 거두어 떠난 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평소 건강한 몸을 이루라고 권했던 그녀이기에 급작스런 죽음은 뜻밖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연의 일부가 되는 영원한 삶을 희망했기에 가장 그다운 이승과의
이별일지도 모른다.
평소 그는 가족들과 삶과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혹시 내게 일이 생기면 누구
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보내주길 바란다”면서 “무덤엔 나무 한 그루 정도 심어
달라”고 예언과고 같은 희망을 말했다고 한다.
그의 희망대로 남은 가족들은 고즈넉하고 양지바른 언덕에 그의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화천/사진.글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명식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연세가 있으셔서 건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지만
한글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점점 촉명해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신다
약 30분정도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억나는건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평화라는 단어의 순수 우리말이 오순도순 이라는 것과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을 한단어만 꼽는다면 아사달 이란 단어~~
김명식 선생과 김념사진한장 찍고 다음에 시간날때 다시오겠습니다 했더니
시간 날때 오지말고 필요할때 다시 오란다~~
김명식 선생은
우리의 모습이 사사질때까지 처마끝 빗물과 함께 그자리에 서서
이별을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역했다
마치 선생의 눈에서 낙수물이 떨어지는듯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장수 하시길~~
선이골을 내려오는길 비는 역시나 억수로 퍼 붇는다
결국은 야영 사이트를 화천대교 다리 아래에 잡는다
십여년 오지여행을 다녀 봤지만 다리아래 사이트 잡고 자기 처음
그래도 비 한방울 안맞는다는 것에 감사할 다름이다
간다 간다 뿅간다 게임에서계속해서 3잔째 마시는~~~
다음날 아침 내가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언제 그랬냐는듯 화천대교 아래 풍경은 너무 이뻣다
전날의 무리한 전투로 전투력이 상실되어
늦은 아침을 먹고 11시가 다되어 화천 시내에서 이삽여분 거리의
파로호 전망대에 도착한다
사실은 파로호 전망대 근처 산위에 높은 곳에서 파로호를 바라볼 예정으로
올라갔는데 산정상 좋은 자리에 군부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회차~~~
사진한장 남기고 두번째 코스인
산 꼭대기 경기 좋은 곳으로 오르니 옛 군부대 자리가 나온다
지금은 모두 철수하고 사용하지 않는곳
그러나 전망은 아주 좋다
고갯길을 얼마나 숨차게 달려 왔는지 다들 뚜꼉을 열고~~~~
멀리 파로호가 보인다
예전에 포나 전차를 배치했던 자리인듯 하다
소대 규모의 병력이 생활했던 시설들
아주 오래된 막사 침상
옛 생각나시는 분덜 많으시겠다
다음 코스는 몇년전 야영하러 갔던곳
잠깐 들러 점심식사로 라면이나 먹고 나오려고 들어갔는데
아주 멋진 장소가 있다! 몇년전 왔을때 진흙뻘이라
야영하면서 고생했던 기억만있었는데~~
라면을 먹으면서 한분이
오늘은 여기서 그냥 자리 펴고 쉬는게 어떻습니까?
어제밤 전투가 힘들었나보다~~
모두가 동의를 하고 이곳에 사이트를 구축한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오침을 즐기고
가끔씩 지나가는 소나기로 타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망중한도 즐겨본다
오지에서의 캠핑은 늘 그렇듯
캠핑장처럼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맘대로 쉬고, 먹고, 놀고, 떠들고 하는 매력이
있지만 가끔 휴대폰 불통지역이 너무 많아 불안한 사람들이 많다
술도 한잔씩하고 낮잠도 자고~~
전화가 안되니 소화도 시킬겸 전화가 되는곳까지 걸어나가 보자고~~~
모두들 전파 찾아 삼만리~~~
눈으로만 봐도 시원하다
밤이 찾아오고 몇분이 더 합류한다
어제 밤의 전투가 너무 치열해서 난 일찍 야전 침대에 누워
물소리 바람소리를 벗삼아 잠을 청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둥근 달이 비춰진다
분위기도 좋고
아침에 일어나 모두들 모닝 알탕 삼매경~
다른 분들 물놀이 하실때 이분은 양치하면서 이상한 운동을 하십니다 ~~ㅎㅎ
정리를 하고 나오기전 기념사진을 남기자 하는데 배는 왜 올리는지
양구 해안면으로 이동하면서
위성으로 봐두었던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민통선 근처로 접근한다
중턱쯤 올랐을까 철문이 잠겨 있다
전화를 하니 민간은 출입할수 었는 곳이란다
단지 군시설관련 공사 등 사전에 허락을 득한자는 출입이 가능하단다
을지 전망대를 가기전에 들른 도솔산지구전투 위령비에 잠시 들린다
해안면이 내려다 보인다
멀리 보이는 산이 도솔산이다
을지점망대와 제4땅굴 매표소
서쪽부터 십자탑전망대, 승리전망대, 을지전망대, 칠성전망대 통일전망대를
돌아봤지만 관리부대마다 전선에 있는 전망대 마다 출입관리가 다 다르다
이곳은 매표만하고 개인차로 진입
제4땅굴 검문소
제 4땅굴을 나와
오늘의 야영사이트를 찾아 들어간다
3년전 왔던곳
계곡 길이가 약 7km정도
초입에는 피서객들이 벅적거리고
계곡 거의 끝까지 오르니 사람도 없고
명당 자리가 나온다
시간이 조금 일러 전화가 되는 곳을 찾기 위해
주변 임도를 따라 산정상을 올라가 보기로 하고 가는데
전혀 관리가 안된 임도라 나무가 우거져 앞이 안보인다
많은 임도를 다녀 봤지만 이런 임도는 처음이다~
약 1km정도 오르니 산마루가 나오고
오래된 군 관련 시설물이 나온다
해안으로 넘어가는 통문인셈이다
시설물에 붙은 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 준다
여기서 임도는 좌우측으로 갈리고 시간만 있다면 계속가보고 싶은데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선다
일단 기념사진 한장 남기고
간신히 전화가 되는 지역인데 KT만 제대로 안터진다
내일아침까지는 전화가 안되는 지역이라 일있으면 톡 남기라고 하니
집에서는 어이 없다는듯~~
계곡으로 내려와 하늘이 점지해 주신 명당자리에
사이트를 구축하고 여유를 부려본다
아무리 봐도 명당이다
첫날 이베리코 돼지고기로 만든 수육이 맛이 닜었는지
오늘 또 다시 수육
오늘아침 합류하신 하얀태양님
이번 여정의 마지막 밤을 맞이 한다
첫날은 비가왔지만 다리아래서 비를 맞지 않았고
둘째날은 오지 계곡에서 둥근 달을 벗삼아 편하게 자고
오늘은 맑은 계곡 옆에서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며 ~~~한잔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시끄러워 깨보니 모닝 알탕을 하시는 분
연휴 마지막 날이라 차가 막힐것을 생각하고 일찍 정리하고 출발
계곡을 오르다 보니 아주 멋진 자리가 몇군데 있다
이곳은 가을에 한번 오는 걸로~~
보이시는가요?
차위에 쓰레기 봉투
여기 까지 여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고고
함께 해주신
행크님, 희락님, 다희아빠, 삿빠, 하늘땅님, 비밀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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